"갈 때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 본인 시처럼 곱게 가신 칠곡 할매

우성덕 기자(wsd@mk.co.kr) 2023. 2. 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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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세에 한글 깨치고 시 써
푸시킨 작품 통째 외우고
작품 '가는꿈'에서 죽음 성찰
향년 94세에 편안한 영면

"먹고 싶은 것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갈 때 돼서 곱게 잘 가는 게 꿈이다."

'칠곡 할매 시인'으로 불리던 박금분 할머니가 자신의 시 '가는 꿈'처럼 곱게 영면했다. 향년 94세.

박 할머니는 87세 나이에 한글을 깨쳐 시를 쓰고 영화에도 출연해 많은 감동을 선사한 인물이다. 칠곡에서 함께 한글을 깨쳤던 칠곡 할매 시인들 중 최고령자인 박 할머니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지난 6일 발인식이 엄수됐다. 유족은 "마치 꽃잎 지듯 곱게 눈을 감으셨다"고 전했다.

유족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당시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고 6·25전쟁과 가난을 이겨내며 역사의 굴곡을 힘겹게 버텨냈다.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농사일로 생업을 이어오다 구순을 바라보던 2015년이 돼서야 칠곡군이 운영하는 약목면 복성리 경로당에 마련된 배움학교에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웠다.

배움에 대한 할머니의 열정은 그 누구 못지않았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통째로 외우고 집 안은 한글 공부한 종이로 가득 뒤덮일 정도였다. 대구의 딸 집에 갔다가도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학교를 찾았다.

배움학교에서는 반장까지 맡았고 폐지를 모아 판 돈으로 함께 공부하는 할머니들에게 회식까지 베풀던 마음씨 좋은 할머니였다.

박 할머니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표현한 '가는 꿈'으로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이 시는 2015년 칠곡군이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 시 98편을 묶어 발행한 시집 '시가 뭐고?'에 실렸다.

2018년 발행한 칠곡 할매들의 시화집 '내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에는 세상을 등진 남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영감'이란 시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2019년에는 김재환 감독의 영화 '칠곡 가시나들'에 출연해 경상도 할매 감성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표현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도 이 영화에 감동해 칠곡 할매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할머니의 열정도 결국 세월과 치매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러다가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면 언제나 연필을 잡을 만큼 마지막 순간까지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할머니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은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했다"며 "칠곡 할머니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관광산업에 접목하고 다양한 콘텐츠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칠곡 우성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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