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오름] 신이 꿰맨 초록색 조각보, 난드르 들판

이승태 여행작가, 오름학교 교장 2024. 9. 23.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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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오름과 모슬봉, 산방산. 질리지 않는 제주 풍광이다.

제주 남서쪽 끝의 대정읍은 제주도 전체에서 평균 고도가 가장 낮은 지역이다. 대부분 평탄해서 광활한 땅을 활용한 밭농사가 활발하다. 오름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동쪽 안덕면과의 경계에 솟은 바굼지오름을 비롯해 송악산, 모슬봉, 가시오름, 돈두악, 보름이오름, 녹남봉까지 7개뿐이고, 그나마 그리 높지도 않다.

모슬봉(180m)과 바굼지오름(158m)이 조금 우뚝한 편이고, 송악산(104m)과 가시악(111m), 녹남봉(97m)이 고만고만, 보름이오름과 돈두악은 50m도 안 된다. 그러나 주변이 전부 평지다 보니 이 오름들은 저마다 존재감을 뽐낸다.

안내도가 서 있는 들머리. 진지동굴도 보인다

원추형처럼 보이지만 말굽형

대정의 큰 항구인 모슬포 북쪽에 2개의 오름이 얼마간 거리를 둔 채 동서로 나란히 솟았다. 좀더 크고 완만한 삼각뿔 모양을 한 것이 모슬봉(180.5m)이고, 그 서쪽으로 봉긋한 게 가시오름(110m)이다. 두 오름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서 저마다 섬처럼 떠 있다. 그 풍광이 유유자적 한가롭다.

가시오름은 옛날에 가시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시나무 종류를 거의 찾을 수 없다. 한자로는 가시악加時岳, 가시악加是岳 등으로 표기한다. 해발고도가 110m, 오름 자체의 높이는 77m에 불과하지만, 사방이 들판이어서 어디서든 도드라진다.

가시오름 상공에서 본 난드르평야와 모슬봉. 녹색 비단 조각보를 펼쳐놓은 듯 황홀한 들판이다.

가시오름은 얼핏 보면 원추형 같지만 남서록(남서쪽 산기슭)에 귤밭이 들어선 얕은 말굽형 굼부리를 품었다. 넓고 평평한 정상부도 둥글넓적한 모양의 굼부리가 아닐까 싶은데, 김종철 선생의 오름책이나 제주도에서 발간한 오름 책자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정상부 초지 한쪽엔 아주 작지만 오목한 습지도 있다. 제주의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솟은 오름 대부분이 그렇듯 가시오름에도 일제 동굴진지가 구축되었다.

오름 사방이 온통 평탄한 밭뙈기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이 들판의 이름은 '난드르'.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넓은 들판을 일컫는 '난들'의 제주어다. 난드르엔 맑은 물이 솟는 샘이 많아서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가시오름 남서쪽의 밭 한가운데에 당시의 흔적인 고인돌(일과리지석묘)도 있다.

띠밭을 이룬 정상. 바람이 불면 더 멋진 풍광을 만나게 된다.

도로에서 바로 시작되는 탐방로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오름에 산담이 거의 없다. 주변이 평야지대고, 산이라고는 가시오름 하나인데, 오름 전체에 겨우 예닐곱 개의 무덤이 확인될 뿐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이곳이 흉지凶地이고 모슬봉은 명당이었을까? 직선거리로 1.7km 떨어진 모슬봉은 오름 전체가 아예 무덤으로 뒤덮인 듯하다.

가시오름 정상부. 넓고 평평한 초지대를 이룬다.

오름의 동북쪽을 스쳐 지나는 1120번 지방도(대한로)에서 바로 탐방로가 시작된다. 그곳에 승용차 한두 대쯤 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북동쪽 사면을 가로질러 곧장 정상까지 가는 이 길은 낡은 나무계단과 초지가 번갈아 나타난다. 주변은 물론, 탐방로에도 풀이 많다. 관리처에서 주기적으로 풀베기를 하지만, 때를 잘못 맞추면 수풀을 헤치느라 고생인 코스다. 중간에 좌우로 길이 몇 번 갈리지만 무시하고 직진하면 된다.

정상은 누가 일부러 깎아놓은 것처럼 꽤 넓고 평평한데, 온통 띠(볏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뒤덮였다. 북쪽엔 산불감시 초소가, 남쪽엔 사각 정자가 보이고, 정자 앞으로는 벤치와 운동시설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운동기구 곳곳에 올라온 녹을 보니 이용하는 이는 드문 듯하다.

정상의 사각정자와 운동시설. 그늘이 부족한 게 흠이다.

신이 꿰맨 초록 조각보

난드르에서 홀로 우뚝한 오름이어서 정상에서는 바람이 시원하고, 사방으로 조망도 빼어나다. 동남쪽으로 한라산을 닮은 모슬봉이 잘 차린 밥상에 덮어둔 보자기 마냥 부드럽게 솟았다. 그 뒤로 바굼지오름과 산방산, 군산이 해안선을 따라 멋진 자태를 뽐낸다.

그러나 가시오름 풍광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난드르 들판이다. 온갖 모양을 한 밭뙈기마다 조금씩 톤이 다른 초록 작물이 가득하다. 초록색이 이리도 다채로웠나 싶어서 보고 또 보는 풍광. 어느 화가의 팔레트가 이처럼 예쁠까!

한켠엔 억새가 무성하다. 가운데 움푹 파인 곳은 습지.

아니, 이 자체가 그대로 명작 중 명작이다. 신이 꿰맨 초록색 조각보 같다. 조망이 마냥 행복한 '난드르'다. 알뜨르비행장 일대와 차귀도를 마주한 고산평야 등이 포함되는 농경지인 이 땅은 마늘과 양파, 브로콜리, 당근, 감자 등 청정하고 싱싱한 제주 농산물이 생산되는 곡창지대다.

초지대 한쪽은 억새가 무성하다. 띠보다 키가 더 커서 눈에 띄는 억새지대 중간엔 살짝 내려앉은 습지대가 보인다. 둘레의 풀이 물가를 좋아하는 것들이다. 굼부리의 흔적일까 하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널찍한 오름 둘레길. 길이 완만하고 그늘도 좋다.

내려설 때는 산불감시초소 앞에서 시작되는 비포장 수렛길을 따르는 편이 좋다. 나선형의 이 길은 서·남·동쪽 사면을 거치며 오름 중턱을 한 바퀴 돈 후 북동쪽에서 탐방로를 만나 출발지로 이어진다.

완만하게 굽어 돌기에 힘들지 않고, 길섶으로 억새와 수크령, 볼레낭 등이 나타나 눈도 즐겁다. 중간에 벤치가 나오고, 그늘도 적당하다. 오름이 높지 않고 탐방로도 복잡한 게 아니어서 1시간쯤이면 넉넉히 오르내린다.

교통

주변을 오가는 버스가 없다. 승용차로 접근해야 하고, 내비게이션에 '가시오름'을 입력하면 된다.

주변볼거리

추사유배지와 추사관

시詩·서書·화畵 분야에서 독특하고 빼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 시대의 대표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9년쯤의 제주 유배 시절 머물렀던 곳이다. 추사는 강도순의 집이던 이곳에서 지내면서 제주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고, 제주에 차 문화를 소개했다. 또 이곳에서 그의 서화 중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남겼다. 적거지 앞, 세한도를 본떠서 완공한 추사관에서 추사와 관련한 다양한 역사 자료를 볼 수 있다.

대정읍성

조선 태종 16년(1416)에 대정현이 설치되었고, 2년 후 첫 현감이던 유신이 읍성을 쌓았다. 조선의 성곽 대부분이 산과 계곡을 끼고 들어선 것과 달리 이곳 대정읍성은 제주 동쪽 표선면 성읍리의 정의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에 터를 잡았다. 성벽 둘레는 1,614m고, 높이는 평균 5m쯤이다. 동쪽과 서쪽, 남쪽에 성문을 두었는데, 각 성문 입구마다 4개의 돌하르방이 육지의 장승처럼 서 있어 눈길을 끈다.

맛집(지역번호 064)

모슬포항의 '제주인의 밥상(064-792-3799)'은 서귀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로 요리한 뱅어상차림, 우럭정식, 문어라면 등이 맛있다. 독특하고 신선한 맛의 흑돼지샤브샤브도 인기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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