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는 소버린이나 론스타 등 외국계 투기 자본의 전유물이자 '먹튀'의 동의어로 통했다. 하지만 최근 여의도의 룰이 바뀌고 있다. 단기 차익 좇기와 맹목적인 경영권 흔들기는 구시대의 유물로 저물어가고 있다.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에 힘입어 이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완화하려는 운용사들이 등판하고 있다. 저평가된 우량 기업을 발굴해 곳간에 잠든 잉여 자본을 유동화하고, 합리적인 자본 배치를 요구하는 게 뉴노멀이 되고 있다. 주주 자본주의의 새 판을 짜고 있는 'K-행동주의 2.0' 주역들을 집중 조명해본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특정 인물이나 경영권이 아니라,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이 그 회사 이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성원 트러스톤자산운용 대표는 <블로터·넘버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내 행동주의 펀드로서 시장에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을 제도와 가격 간 간극을 좁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상법 개정으로 제도가 갖춰졌지만 시장 가격은 아직 따라오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트러스톤은 주주관여를 주전략으로 하는 스페셜시츄에이션 운용본부를 별도 조직으로 분리해 운용하고 있다. 3월 주주총회를 거쳐 3인 각자대표 체제로 전환했고 이 대표는 주주관여 부문을 맡았다. 2013년 만도의 한라건설 유상증자에 반대해 주금납입중지 가처분을 낸 이후 13년째 주주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주총 시즌이 끝나고 반년이 지난 시점에 이 대표에게 현장의 변화와 다음 행보를 물었다.
"제도 개선 후 기업도 달라지는 중"
이 대표는 상법 개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7월 합산 3%룰과 9월 분리선출 감사위원 확대를 시행하면서 2027년 정기주총부터는 감사위원 선임에서 지분율 계산이 달라진다.
그는 "정부가 제도를 개선했고 기업도 태도를 바꾸는 중"이라며 "대주주 측 의결권이 3%로 묶이기 때문에 지분율이 높은 회사일수록 개선 효과가 더 크다"고 분석했다.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로는 두 가지를 꼽았다. 이 대표는 "기업이 먼저 접촉하는 빈도가 늘었고 이사회 안에서 '위법 소지가 있다'는 한마디의 무게가 달라졌다"며 "이사들이 법적 책임을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다만 섣부른 평가는 유보했다. 그는 "제도가 생긴 것과 실제 쓰이는 것은 다르다"며 "합산 3%룰이 표 대결에서 몇 번이나 쓰이는 지를 봐야한다. 향후 2~3년간 이사회 결과가 행동주의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기업이 트러스톤을 찾는 경우는 두 갈래다. 주주환원 계획을 세우기 전 시장의 반응을 예측하거나 문제 제기 후 수습하는 경우다. 이 대표는 "기업이 시장의 반응을 신경쓰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이 의미 있는 변화"라고 전했다.
트러스톤의 전략은 비공개 대화에서 시작해 공개 주주서한과 주주제안, 이사회 진입으로 올라간다. 가처분 등 법적 절차까지 염두에 둔다. 이 대표는 "기업과 대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압박 수위를 높이려고 공개서한을 보내는 일은 없다"며 "단계 설정은 운용사의 의지가 아니라 회사의 대응에 따라 정해진다"고 설명했다.
트러스톤의 경쟁력으로는 경험을 들었다. 그는 "비공개 대화부터 법적 절차까지 전 단계를 실제로 해본 경험이 있다"며 "기업이 이같은 전략과 경험을 인식하면 첫 단계에서 우호적인 대화를 풀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제도와 가격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을 강조했다. 그는 "패시브나 대형 액티브는 종목당 비중이 작아 비용 대비 실익이 안 나온다"며 "행동주의 펀드는 소수 종목에 집중하는 만큼 관여 결과가 성과로 직결된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개선 효과는 해당 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한 회사에서 자사주가 소각되면 같은 업종의 다른 이사회가 비슷한 안건을 검토하기 시작한다"며 "시장 전체의 저평가 해소가 진행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모범적인 자산운용사
이 대표는 주주관여를 별도 조직으로 분리한 이유에 대해 "운용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종목 수가 적고 보유 기간이 길며 회사와의 소통과 법적 절차가 운용만큼 중요하다"며 "주주관여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성과를 분리해 보여줄 수 있느냐'가 지속 가능성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트러스톤은 스스로를 행동주의 운용사가 아닌 주식, 채권, 대체자산 등 30조원에 육박하는 자산을 운용하는 종합자산운용사로 규정했다. 이 대표는 "국내 주식을 가장 큰 비중으로 운용하는 종합자산운용사 중 하나로서 그 중 일부가 행동주의 펀드를 다루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상장지수펀드(ETF)는 자금이 들어오면 밸류에이션과 관계없이 매수하는 구조여서 가격 발견 기능이 없다"며 "트러스톤의 강점인 주식형 펀드는 가격 발견 기능을 담당하고 시장 변동성도 줄인다"고 말했다.
최근 버스 광고로 대중 접점을 넓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대표는 "ETF로 자금이 몰리고 있지만 주식형 펀드가 재평가받는 국면도 올 것"이라며 "트러스톤이 주식형 펀드를 운용하는 회사라는 인상을 일반 투자자에게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13년 전 만도 변화도 이끌어…대화가 먼저
13년 전 만도의 변화를 이끈 것이 트러스톤의 첫 주주활동이다. 당시 만도는 부실 계열사인 한라건설을 직접 지원하지 못하자 완전자회사를 내세워 우회 지원에 나섰다.
트러스톤은 주금납입중지 가처분을 냈지만 이사회의 결의와 납입이 기습적으로 처리되면서 이를 막지 못했다. 다만 이 대표는 만도 측과 접촉했고 추천 사외이사 선임,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유상증자 발표 뒤 절반 수준으로 내렸던 주가도 회복됐다. 트러스톤은 이 주주관여 활동으로 굵직한 트랙레코드를 쌓았다는 평가다.
이 대표는 "당시 활동은 소수의견에 불과했다"며 "이사의 충실의무나 합산 3%룰처럼 트러스톤이 오랫동안 주장한 것들이 개정 상법에 반영돼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트러스톤과 기업이 합의한 사례는 대부분 공개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관여의 상당 부분이 비공개 단계에서 마무리한다"며 "비공개로 끝난 사례일수록 운용사와 기업이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공개 행동까지 펼치는 것은 대화가 막혔다는 뜻"이라고 했다.
공개로 전환된 사례로는 KCC를 들었다. 그는 "기업이 자사주 소각을 수용했고 비핵심 자산 유동화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반대 사례인 태광산업에 관해서는 언급을 아꼈다. 이 대표는 "이사회에 보낸 서한의 10개 질의에 대한 답변은 아직 없다. 회신 기한은 10월 3일"이라며 "회신이 없다면 이사회 의사록과 장부 열람 등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정 인물이나 경영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주요 의사결정이 이사회에서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트러스톤에서 주주관여를 전담하는 스페셜시츄에이션 운용본부는 6명이다. 경영학 박사와 변호사, 투자은행(IB) 출신, 리서치 전문가로 구성됐다. 수탁자책임실 인력 2명을 더해 주주관여를 담당하는 전문 조직은 총 8명이다.
이 가운데 변호사가 2명이다. 법무 인력을 내부에 두는 것을 경쟁력으로 봤기 때문이다. AUM 확대에 맞춰 인력을 추가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시장에 저평가된 영역으로는 '복합기업 할인' 기업을 꼽았다. 이 대표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있고 거버넌스 개선으로 저평가를 해소할 수 있는 기업이 기본"이라며 "여러 사업을 묶어 각 사업의 가치가 반영되지 않는 기업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신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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