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유운학 중령 월북, 전방 대대장의 충격적인 탈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77년 10월 20일 발생한 유운학 중령 월북이다. 당시 육군 20사단 62연대(또는 60연대) 대대장으로 연천·철원 일대 DMZ 경계를 맡던 그는, 무전병 오봉주 일병을 데리고 “순찰을 나간다”며 지프차를 타고 철책선으로 향했다. 철책 근처에서 차량을 세운 뒤 권총을 꺼내 운전병과 무전병을 위협해 월북을 강요했고, 거부한 운전병의 발에 총을 쏜 뒤 부상당한 운전병을 남겨두고 무전병과 함께 지뢰가 없는 역곡천 인근 25m 폭 구간을 통과해 월북에 성공했다. DMZ 지휘관급 현역 장교의 월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군과 청와대는 비상에 걸렸고, 박정희 대통령은 재떨이를 집어 던지며 격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20사단을 전방에서 후방으로 빼고 5사단을 투입하라고 지시해, 그날 밤 연천·철원 일대 20사단 부대들이 양평 등 후방으로 철수하는 징계성 재배치가 이뤄졌다.

GP 학살 후 월북, 조준희 일병 사건
1984년 6월 26일에는 강원도 고성군 까치봉 전방 GP에서 근무하던 조준희 일병이 동료들을 학살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하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22사단 56연대 4대대 소속 상황병이던 그는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이어 M16 소총을 난사해 동료 12~15명을 살해하고 11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무장을 한 채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도주했다. 초기에는 북측의 기습공격으로 오인됐지만, 다음 날 북한의 대남 방송에서 조 일병이 직접 “의거 월북”을 선전하며 사실이 확인됐다. 추격에 나섰던 수색대원 네 명은 지뢰를 밟아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기도 했다. 북한은 조준희를 “영웅”으로 떠받들며 선전도구로 활용했고, 한국군은 사단장·연대장·대대장 등 지휘부를 줄줄이 보직 해임·전역시키는 등 대규모 문책에 나섰다.

1950~70년대 월북 규모, 군인만 391명 추정
고(故) 강창성 전 의원 조사에 따르면, 1953년 정전 이후 1979년까지 월북한 한국군은 391명에 이른다. 1980~1989년 사이에는 17명, 1990~1995년에는 3명으로 줄어들어, 1980년대를 기점으로 월북이 급감했음을 보여준다. 정부가 공개한 정전 이후 전체 월북자 수는 약 600명이고, 이 중 과반이 군인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중반까지 DMZ는 철조망·초소 수준의 경계에 그쳐 민간인 월북도 일정 규모 있었고, 1966년 이후 철책선·감시체계 강화와 함께 민간인 월북은 크게 줄어들었다는 평가다. 녹색연합 서재철 전문위원은 “1980년대 이전에는 남북 체제 경쟁에서 남쪽이 뒤처져 있다는 인식과 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심리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군도 6명 월북…대부분 선전도구·사실상 감옥생활
정전 이후 월북자 명단에는 미군도 최소 6명이 포함된다. 알려진 첫 사례는 1962년 DMZ 근무 중 월북한 래리 앱셔(Larry Abshier) 일병으로, 대마초 문제로 군법회의를 앞두고 처벌을 피하려고 북으로 넘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해 8월에는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James Joseph Dresnok) 일병이 상관 서명을 위조한 외출증 사건으로 처벌이 예상되자 DMZ 철책을 넘어 월북했다. 이후 제리 패리시 상병, 찰스 로버트 젠킨스 하사 등이 1960년대 중반까지 순차적으로 월북해 이들과 합류했다. 북한은 이들을 판문점·평양 선전물, 영화·연극, 대남 방송에 동원하며 미군·미국 사회를 비난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월북 미군 대부분은 김일성 ‘학습’과 강제 결혼, 감시 아래의 생활 등 사실상 감옥과 다름없는 환경에서 지냈고, 병·노쇠로 현지에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많다.

젠킨스·드레스녹, 국제적으로 알려진 월북 미군 사례
월북 미군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1965년 1월 술김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고 알려진 찰스 로버트 젠킨스 하사다. 그는 일본인 납북 피해자와 결혼해 북한에서 생활하다가, 2004년 북·일 수교 협상 과정에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귀환 후 미군 탈영·이적행위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아 30일 금고형을 선고받고 25일 복역 뒤 모범수로 조기 출소했다. 제임스 드레스녹은 2006년 BBC 다큐멘터리 ‘Crossing the Line(경계선을 넘어서)’를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졌으며, 2016년 평양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마지막 생존 월북 미군으로 남아 있었다. 1982년 파주 서부전선을 넘어간 조지프 화이트 일병은 알려진 마지막 미군 월북자로 꼽힌다.

월북의 역사에서 탈북의 시대로
1950~7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력·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뒤처져 있다는 인식, 독재정권과 보안부대의 감시·탄압, 군내 갈등·범죄 은폐 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극단적 선택으로서 월북을 택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군인 월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군 수뇌부는 대규모 문책과 부대 재편으로 대응했고, 박정희 정권은 ‘군기 확립’ 명분 아래 보안 통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남한의 급속한 경제성장, 민주화, 북한의 경제난과 기근이 겹치면서 남에서 북으로 향하던 흐름은 급격히 줄고, 199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오히려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탈북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시대가 열렸다. 이제 군사분계선을 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쪽을 향하고, 과거 군인·미군까지 포함됐던 월북 사건들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이자, 한반도 분단 구조와 체제 경쟁이 빚어낸 극단적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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