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은 지구에서 가장 강한 나라이자, 폐허가 된 지구의 나머지 절반에게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땅이라는 환상이 되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이민자가 각자의 꿈을 가지고 이 무식하게 거대한 나라에 모여들었고, 거기에 스스로의 열정과 영혼까지 바쳐가며 미국이라는 허황된 꿈에 더더욱 바람을 불어넣었다.
브래디 코르베의 3번째 장편, <더 브루탈리스트>는 이러한 이민자들의 디아스포라 콤플렉스와 그들이 누구에게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팔았고, 이것이 미국을 어떻게 성장하게 했는지에 대해 다루는 야심 가득한 영화다. 요즘 영화 산업에서는, 특히 극장용 영화로서는 더더욱 보기 힘든 3시간 30분짜리 대서사 영화이며, 이 영화의 제목이면서 주요 키워드로 작용하는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처럼 꾸밈없이 미니멀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더 브루탈리스트>는 건축가 출신 헝가리 이민자 라슬로 토스가 칠흑 같은 배 속을 헤집고 나와서는, 거꾸로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미국에 무사히 도착한 것에 대해 환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니엘 블룸버그의 웅장한 스코어링과 함께 롤 크론리가 촬영한 비스타비전 포맷의 압도감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동시에 앞으로의 긴 세월 동안 라슬로가 뼈저리게 느끼게 될 이 괴물 국가의 거대함과 뒤틀린 기이함을 암시하는 서곡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라슬로 토스가 전쟁 전에는 헝가리의 아주 뛰어난 브루탈리즘 건축가였으며 전쟁 동안 나치에게 핍박받은 유대인임을 알게 되긴 하지만, 적어도 영화의 초반에는 라슬로의 배경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라슬로에게는 미국에 먼저 정착해서 가구점을 운영하는 사촌 아틸라가 있고, 달리 갈 곳이 없는 라슬로는 처음에는 아틸라의 가구점에서 일하면서 함께 지내게 된다. 아틸라에게는 가톨릭 신자인 아내 오드리가 있는데, 아틸라 역시 아내를 따라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영어 억양까지 미국식으로 바꾸는 등, 미국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본인의 헝가리 유대인 정체성을 이 자본주의 국가의 입맛에 맞게 인위적으로 바꾼 것처럼 보인다.
아틸라는 오드리와 함께 가구점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긴 하지만 작가주의 디자인을 지향하는 라슬로의 눈에 아틸라가 판매하는 가구에는 예술이 없다. 특히 라슬로가 디자인한 모더니즘 의자를 두고 오드리가 마치 세발자전거처럼 보인다고 평하는 모습에서, 사물의 표현보다 기능을 더 중요시하는 아틸라 부부의 미국적인 실용주의 가치관과 라슬로의 예술적인 가치관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음이 잘 드러난다.
그러던 어느 날 아틸라의 가구점에 해리 리 밴 뷰런이 찾아와서는 아버지의 집 서재 리모델링을 맡기면서 라슬로의 재능을 펼칠 기회가 찾아온다. 아틸라는 본래 하던 대로 필요한 자재를 최소화하여 비용적으로 합리적인 리모델링을 제안하려고 했는데, 라슬로의 예술적인 야망은 이보다 더 거대했다. 결국은 라슬로의 뜻에 따라 본래보다 훨씬 더 높은 의뢰비로 아주 훌륭한 모더니즘 서재를 완성하게 되지만, 공사판이 되어버린 집을 발견한 해리의 아버지, 해리슨이 아틸라와 라슬로를 내쫓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다. 게다가 리모델링을 발주했던 해리가 의뢰비 지급을 거부하고, 평소 유대인 이민자인 라슬로의 문화적 이질성을 아니꼽게 여겼던 오드리의 음해로 결국 아틸라는 라슬로를 가구점에서 쫓아내게 된다.

몇 달이 빠르게 흘러간 뒤 공사판에서 인부로 일하는 라슬로의 초라한 모습이 나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뒤늦게 그가 디자인한 서재의 진가를 알게 된 해리슨 밴 뷰런이 다시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 해리슨은 전시에 수송선 대량 건조 기술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고 언급되는데, 아무래도 미국이 당시 엄청난 속도로 건조했던 표준 수송선인 리버티급 수송선에 대한 것처럼 보인다.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한 리버티선을 건조했던 그의 경력은 그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인지 잘 나타내준다.
해리슨은 본인의 죽은 어머니를 기념할 거대한 회관을 세울 충분한 재력이 있지만, 거기에 제대로 영혼을 불어넣을 창의적인 영감이나 예술적인 비전은 없다. 라슬로를 다시 알아보게 된 것도 그가 설계한 서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의 능력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명문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 출신으로서 부다페스트의 브루탈리즘 건축물들을 설계했던 그의 과거 명성에 탄복했기 때문이었다. 즉, 해리슨의 진짜 목적은 라슬로의 손을 빌려 본인의 텅 빈 교양에 아주 값비싸고 지적인 이미지를 씌우고자 하는 것이며, 이는 라슬로에게 회관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때부터 해리슨에게는 예술에 대한 진심 어린 열망이 없었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그는 무너진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들을 서서히 잠식해나가는데 아주 능숙한 사업가다. 이런 해리슨에게 가진 것 없는 예술가인 라슬로는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고,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국경에 발이 묶인 그의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를 데려오는 것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면서 라슬로는 해리슨의 회관 설계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영화가 ‘자기 자신이 정말 자유롭다고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야말로 절망적인 노예 상태이다.’라는 괴테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마침내 라슬로의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지점은 상당한 불안감 역시 공존하는 셈이다.

영화에서 적어도 1막까지는 표면상으로 라슬로와 해리슨 사이의 갈등이 심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야심 찬 건축 프로젝트가 나름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리슨과 그의 아들 해리는 라슬로가 모든 통제력을 가지고 마음껏 재능을 펼치도록 가만두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건축 기술자와 건축 고문을 고용하여 라슬로와 계속 충돌하도록 함으로써 그의 자기 주도력을 서서히 상실시키고, 종국에는 그를 완전히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이 영화 내내 라슬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데, 이러한 둘 사이의 관계적 역동성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 줄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라슬로와 해리슨의 관계는 이탈리아의 대리석 광산에서 해리슨의 충격적인 행동으로 극에 치밀게 된다. 그곳에서의 해리슨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선을 넘는 범죄 행위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이민자들을 대하는 방식을 자본가와 예술가의 착취적인 관계에 비추어내는 은유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그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질투하는 위선에 대한 아이러니가 <더 브루탈리스트>에 담겨 있다. 나중에 광산에서의 일에 대해 알게 된 에르제벳이 해리슨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타나서 그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고발하는데, 여기서 그녀의 고발은 단순히 해리슨과 라슬로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희망을 품고 미국에 온 수백만 명의 이민자와 그들의 경험에 대한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민은 낯선 땅에 정착하여 자신의 ‘집’을 건설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 나라에서 먹고 일하고 자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도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내 주도권이 없다면 결국은 남의 집에서 사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잠시 해리슨의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를 미국에 정착하려는 라슬로의 삶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라슬로는 분명 이러한 프로젝트를 감독하여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이 있지만, 결국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인물은 자본을 대는 해리슨이다. 물론 이것을 후원자의 돈으로 예술을 하는 예술가에게 따라붙는 필연적인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해리슨은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후원자라기보다 예술의 수단을 미끼 삼아 라슬로를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포식자에 더 가깝다. 하지만 라슬로는 이를 모두 알고 있음에도 해리슨의 거대한 지적 허영 프로젝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한다. 건축 자재가 모자라서 예산을 초과할 위기에 닥쳤을 때는 본인의 월급에서 빼라는 약간은 무책임한 말을 하기도 하고, 광산에서 끔찍한 일을 겪어 심리적으로 피폐해진 이후에도 프로젝트에서만큼은 손을 떼지 않으므로 이것을 예술가 특유의 자폐성이라고 오해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밝혀지기를, 사실 이러한 라슬로의 병적인 집착은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본인의 낯선 자아를 증명하는 것에 대한 갈망, 그러니까 자신의 무너진 ‘집’을 재건하려는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촌 아틸라는 본래 정체성, 그러니까 본인의 무너진 집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미국을 집처럼 여겼지만, 라슬로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자신의 정체성을 개조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을 건축물을 통해 전면에 내세우기로 했다. 해리슨이 라슬로를 사교 파티에 초대했을 때, 라슬로가 그에게 “정육면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그것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라슬로는 유대인으로서 시대적인 압제와 숱한 고초를 겪었던 본인과 아내 에르제벳, 그리고 당시의 모든 이민자의 고통과 시련을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로서 형상화했으며, 이를 통해 모든 이민자의 무너진 집을 재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극 중에서 라슬로의 건축물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는 아마 조피아일 것이다. 사실 조피아는 이 영화의 가장 시작부터 등장하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는 약간은 병풍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는 조피아가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로 실어증에 걸린 탓에 등장하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침묵으로 유지하기 때문인데, 이 캐릭터가 사실은 라슬로 토스와 많은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그녀가 영화 전반에 걸쳐 보여주는 심리적 변화의 양상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조피아는 일단 라슬로 토스의 가족 일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라슬로를 비롯하여 당시 가슴에 역사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던 모든 이민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영화 대부분을 침묵으로 보내던 그녀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에필로그에서 유창한 언변으로 라슬로가 만든 건축물에 대해 진심 어린 헌사를 보내는 모습은, 라슬로의 건축물이 어떻게 그들의 트라우마를 연결해서 치유하고 성장하게 했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에 깊은 울림을 낸다.

라슬로 토스의 미국에서의 긴 세월은 거대한 자본 아래에서 본인의 예술적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코르베는 그러한 예술적 변혁의 흐름을 독특한 영화적인 리듬으로 구현하여 이 영화에 색다른 역사성을 부여했다. 잊혀 있던 과거의 와이드스크린 유산인 비스타비전 필름을 다시 꺼낸 것부터 시작하여 15분의 인터미션을 삽입한 것까지, <더 브루탈리스트>는 고전 헐리웃 서사 영화의 웅장함을 담아내려는 야심으로 꽉 차 있다. 하지만 누벨바그 점프컷이나 소비에트 몽타주처럼 그 고전적 규범을 이탈하는 자유롭고 즉흥적인 에너지 역시 존재하며, 몇몇 롱테이크는 헝가리의 거장, 벨라 타르 영화의 삭막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코르베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다른 스타일을 병치시켜 예술과 산업의 충돌 역학을 구현했는데, 여기에는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와 예술적 발전에 대한 경의, 그리고 인간이 왜 미래에 집착하면서도 과거를 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담겨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 조피아가 연설에서 하는 말이다. 예술은 불완전한 이들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방종과 갈등, 아픔 같은 것들과 직면할지라도, 그것들을 자아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예술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죽고 사라진 뒤에도 우뚝 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술을 끊임없이 탐닉하도록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더 브루탈리스트>에서 드러나는 코르베의 야심과 과장은 결코 이유 없는 것들이 아니다. 이 영화는 그가 아날로그의 영원성과 미니멀리즘의 원초성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으며, 그것들이 바로 <더 브루탈리스트>를 영원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