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잘나갈 때 줄줄이 참패...한국을 바꾼 '히딩크 매직'의 시작[뉴스속오늘]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I'm still hungry)."
24년 전 오늘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전이 닻을 올렸다. '2002 한일 월드컵'을 1년반 가량 남긴 시기에 제62대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Guus Hiddink)가 선임됐다. 올해로 80세가 된 히딩크는 당시 55세의 유망한 지도자였다. 네덜란드 축구대표팀을 이끌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4위에 올렸고 스페인 라리가의 명문팀 레알 마드리드, 발렌시아 감독도 지냈다.
히딩크 영입 당시 월드컵 개최를 앞둔 한국 축구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직전 월드컵인 프랑스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와 조별 경기에서 5대0 참패를 기록했다. 2000년 9월 시드니 올림픽과 10월 아시안컵에서도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반면 공동 개최국인 일본은 프랑스 출신의 필립 트루시에 감독 하에 시드니 올림픽 8강, 아시안컵 우승을 달성하며 기세등등했다.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이란 수모를 겪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한국 축구계를 감싸고 있었다. 대한축구협회는 기술위원회를 통해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는데 무게를 두고 세계적 명장들과 접촉했으나 난항을 겪었다. 1순위는 프랑스 월드컵 우승 감독인 에메 자케였지만 거절 당했다.
하지만 2순위였던 히딩크는 달랐다. 그는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위로 이끌었지만, 이후 레알 마드리드와 레알 베티스에서 연이어 경질을 당했다. 야인 신세였던 그에게 한국행은 재기의 기회였다. 결정적이었던 건 대한축구협회의 파격적인 지원 약속이었다. 장기 합숙 훈련을 K리그 구단들과 합의해 가능토록 했고 유럽·남미 강팀들과의 친선경기도 전폭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월드컵 직전까지 이어진 평가전에서 프랑스, 체코 등 강팀들에게 0-5로 대패하며 '오대영 감독'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질타가 쏟아졌지만 히딩크는 "우리는 매일 1%씩 좋아지고 있다",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라며 흔들림 없이 자신의 축구 철학인 '체력과 조직력' 강화에 집중했다.
2002년 6월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본선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월드컵 사상 첫 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포르투갈과 16강 이탈리아, 8강 스페인 등 우승 후보들을 연파하며 아시아 최초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써 내려갔다. 이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 성적이었다. 16강 확정 직후 그가 남긴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란 말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언으로 남았다.
히딩크호는 명실상부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중 최강으로 꼽힌다. 홍명보, 유상철이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에 올렸고 홍명보는 아시아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히딩크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박지성과 이영표, 설기현 등이 유럽 무대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현재 한국 축구를 이끌고 있는 손흥민, 김민재 등을 만든 밑거름이 됐다.
한국인들에게 이름도 낯설었던 외국인 감독의 취임은 한국 축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히딩크가 남긴 기록은 단순한 성적을 넘어,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시스템의 중요성을 일깨운 계기가 됐다. 히딩크는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약속대로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번으로 떠났다.

이재윤 기자 mto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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