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세옷을 아시나요?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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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단어 하나를 입안에서 오래 굴려보곤 한다.
'보세(保稅)'도 그런 단어다.
사람들은 흔히 '보세 옷'이라는 말로 이 단어를 친숙하게 쓰지만 정작 관세 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다시 '보세'라는 단어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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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단어 하나를 입안에서 오래 굴려보곤 한다. 사전적 의미를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단어가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다. 단어가 어디서 왔고 어떤 사연을 거쳐 지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때로는 복잡한 세상의 흐름이 또렷하게 이해될 때가 있다.
‘보세(保稅)’도 그런 단어다. 사람들은 흔히 ‘보세 옷’이라는 말로 이 단어를 친숙하게 쓰지만 정작 관세 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보세는 ‘관세 부과를 보류한다’는 뜻으로 보세가공제도는 외국 원재료를 세금 부담 없이 반입해 제조·가공한 후 다시 수출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다. 1970년대 원단을 들여와 옷을 만들어 수출하던 우리 기업에 이런 제도는 가공에만 집중하게 해준 고마운 존재였다. 당시 해외로 나가지 못한 물량이 동대문 시장 등으로 흘러들며 ‘보세 옷’이라는 표현이 퍼져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제는 ‘브랜드가 없는 저렴한 옷’을 가리키는 생활어로 굳어졌지만 그 안에는 사실 한 시대의 수출 전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보세’가 이제 옷감을 넘어 첨단산업의 심장부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조선·방산처럼 거대한 설비와 정밀한 공정이 필요한 산업에서 보세가공제도는 공정이 멈추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준다. 수출 경쟁력은 완성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원재료가 제때 들어오고 생산이 끊기지 않으며 결과물이 빠르게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흐름’이 본질이다. 관세청은 이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수출 엔진에 윤활유를 붓는 마음으로 보세가공제도를 다듬어 왔다.
우선 항공기 유지·수리·개조(MRO) 분야에서는 수만 개의 항공 부품에 대해 건별로 받던 보세 물품 반입 승인을 일괄 승인으로 전환해 신속한 개조·수리가 가능하도록 개선했다. 미군함 MRO 분야 역시 일반 부두 작업을 허용하고 원재료 반출입을 간소화해 작업 공간과 절차 측면에서 보세제도의 제약을 완화했다. 또한 부산의 석유 저장 시설을 ‘종합보세구역’으로 신규 지정해 친환경 선박유를 부산에서 바로 블렌딩해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등 미래 물류 인프라 조성도 지원하고 있다.
이제는 ‘현장의 불편을 더는 것’을 넘어 보세가공제도를 첨단산업 경쟁력의 가속장치로 발전시켜야 한다. 먼저 반도체 등 첨단기업 연구소를 보세 공장으로 운영할 수 있게 개선하고자 한다. 연구실의 아이디어가 세금 장벽 없이 곧장 시제품이 되고 즉시 양산으로 이어지게 할 방침이다. 기술 개발 속도가 곧 경쟁력인 산업에서 연구개발(R&D)과 생산의 간격을 좁혀 초격차 기술 확보를 뒷받침하겠다는 취지다. 아울러 북극항로 개척에 필요한 쇄빙선 등을 과세보류 상태로 건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각종 물류 시설에 대한 종합보세구역 지정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부산항은 선박 연료 공급과 물류를 처리하는 ‘최종 항구(Last Port)’로서 미래 국제 물류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대한민국 수출액은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눈부신 성취의 이면에는 첨단·주력 산업 수출의 90% 이상을 묵묵히 뒷받침해온 보세가공제도가 있다. 자원 빈국이라는 한계를 제도로 보완하고 기술과 공정으로 가치를 더해온 결과다.
다시 ‘보세’라는 단어로 돌아온다. 보세는 세금을 잠시 미뤄두는 약속의 말이다. 그 ‘잠시’가 기업에는 혁신의 시간이 된다. 우리 기업이 그 귀한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도록 낡은 규제를 바꾸고 막힌 흐름을 뚫어 대한민국 산업의 대도약을 뒷받침하겠다.
유현욱 기자 ab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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