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삭’당한 가을… 옷장사도 횟집도 축제도 다 꼬여버렸다
기후변화가 낳은
가을 실종 사건
기나긴 폭염 끝, 마침내 가을이 오긴 왔다. 그런데 왠지 쎄~하다. 만끽하지 못한 채 찰나처럼 스쳐 지나갈까 봐. 시작일 뿐인데 벌써 아쉽다.
기상청은 최근 “10월 평균 기온은 평년보다 높고 더위가 간간이 이어지겠다”며 “그리고 평년보다 더 추운 겨울이 바로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여름 섭씨 40도의 폭염을 맞힌 기후학자 김해동 계명대 교수도 “11월 초까지 20도대 더위가 이어지다 갑자기 추워져 영하 18도의 한파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후 변화로 인해 더위와 추위가 양극화됐다며 “최근 10년 데이터를 보면 가을이 실종되고 있다. 올해도 가을다운 가을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고로 가을은 새 옷으로 멋 내고, 풍성하게 쏟아지는 제철 음식 먹고, 사람 만나 어울리라고 있는 계절이다. 그렇게 곳간을 채우고 살림에 윤기가 돌았다. 그러나 가을 패션과 별미가 사라지고, 축제는 꼬이고 있다. 순삭(순간삭제)당한, 당황스러운 가을 풍경.
“가을옷은 부자나 입는 것”
경기도의 직장인 권모(28)씨는 지난 8~9월 근교 대형 쇼핑몰을 수차례 찾았다. 여름 끝물인 이때는 각 패션 브랜드가 가을 스웨터와 야상, 트렌치코트, 트위드 재킷 신상품을 내놓는 시기다. 그는 올가을 뉴욕·파리의 패션위크 키워드는 깃털과 레이스, 모피가 난무하는 ‘보헤미안 시크’라는 분석도 봤고, 가죽과 니트와 실크로 휘감은 여배우 공항 패션도 소셜미디어에서 종종 감상한다.
그러나 딴 나라 얘기다. 권씨는 이번에 가을옷은 한 벌도 사지 않고, 기능성 반팔 티셔츠만 두 장 샀다. 그는 “추석에도 폭염이었는데 무슨 가을옷이냐. 더워서 실내 쇼핑몰에서 놀다 온 것”이라며 “가을이 기껏해야 2~3주 정도인데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한 가을 외투를 사는 건 낭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래 사이에선 “가을옷은 부자나 입는 것””가을옷과 봄옷 구분까지 하면 재벌이나 연예인”이란 말이 돈다고 한다.
IT업계에서 일하는 30대 남성 이모씨는 “한국은 이제 4계절이 아닌 (여름·겨울) 2계절 국가”라고 말했다. “2~3년 전부터 내 옷장은 여름옷과 겨울옷으로 단순화됐다. 4월부터 10월까지 반팔을 입으니, 간절기 얇은 점퍼 정도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패딩에 기모 후드티·바지면 끝”이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의 주부 박미연씨도 “10월까지 온 가족 여름옷과 침구를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빨아 쓰다 보니 ‘기후변화 현타’가 오더라”며 “가을 쇼핑, 가을 인테리어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패션 유통 업계엔 ‘진정한 장사는 가을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었다. 가을은 명절과 모임·나들이 등 행사가 많고, 겹쳐 입거나 소품을 활용할 수 있어 멋쟁이의 계절로 통했다. 또 소재와 트렌드, 브랜드에 민감해져 고가 의류도 잘 팔렸다.
그러나 요즘 백화점과 대형 마트부터 지역 상권, 온라인 쇼핑몰 업자까지 울상이다. 길어진 불황에 계절까지 극단화하자 소비자들이 간절기 옷 지출부터 줄인다는 것이다. 서울 반포 고속버스터미널의 한 상인은 “가을 신상품이 거의 안 팔려 전체 매출이 작년보다 30%는 꺾였다”고 했다. 유명 쇼핑몰 측도 “가을 재킷이나 레저용 바람막이는 파격 세일을 해도 관심을 못 끈다”고 전했다.
결국 가을 장사는 포기하고 겨울 장사로 넘어가는 추세다. 가을 정기세일에 돌입한 백화점마다 가을 외투와 구두보다는 패딩과 부츠를 앞서 진열 중이다. 가을옷 살 돈을 아껴 좀 더 좋은 방한 용품을 산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가을 패션의 대명사였던 트렌치코트는 판매량이 매년 급감, 각 브랜드의 ‘불효자’가 됐다.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처분하고 있다. 증권사 직원인 40대 정모씨는 “지난봄 당근마켓에서 버버리 중고 코트를 단돈 5만원에 샀다. 판매자가 ‘입을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하더라. 나도 그럴 것 같긴 하다”고 했다. 중고나라에선 10월 2일 기준 여성용 버버리 트렌치코트 매물이 약 200건 올라와 있는데, 평균 가격이 2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며느리 아닌 전어가 집 나갔다”
가을 전어는 집 나간 며느리도 불러들인댔는데, 전어가 먼저 집을 나가버렸다. 지난 주말 인천 소래포구를 찾은 손님들은 횟집마다 붙은 ‘오늘도 전어 안 들어왔다’는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그나마 전어를 확보했다는 식당에선 가격이 예년의 두 배쯤 올라 있었다.
이유는 독하고 길어진 폭염 때문. 지난여름 해수면 온도가 27~28도로 작년보다도 2~3도 높아졌다. 전어는 찬 바닷물을 좋아하는 한대성(寒帶性) 어종이다. 8월 이후 바닷물이 차가워지면 지방층이 두꺼워지면서 고소한 맛을 낸다.
그런데 얕은 바다에 사는 이 물고기는 해수면 온도 상승의 직격탄을 받는다. 전어는 해마다 국내 연안에서 10만톤 이상 생산됐으나, 2020년쯤부터 매년 급감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 생산량의 반 토막이 나면서 씨가 말랐다. 어민들은 “실제 어획량이 작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전어 같은 한대성 어종인 참조기나 ‘국민 횟감’ 양식 우럭도 생산량이 줄어 추석부터 가을 수산물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조개·굴 등 어패류와 멍게가 대거 폐사했고, 가을 보양식인 낙지와 주꾸미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김도 같은 이유로 가격이 뛰었다. 대신 꽃게와 대하 같은 난류성 어종은 바닷물이 따뜻해지면서 생산량이 크게 늘어 풍년이다.
또 다른 가을의 고급 별미인 송이버섯도 구경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자연산 송이는 9~10월에 일교차가 크고 지표면 온도가 낮고 땅이 촉촉해야 특유의 향을 머금고 자라나는데, 지난 9월까지 열대야가 계속되고 가뭄이 들어 역대급 흉작이라고 한다.
최근 강원도 등에서 송이 공판이 시작됐는데 1등급 가격이 1kg당 160만원으로 역대 최고가를 찍었다. 송이버섯을 내놓던 요리점들은 “어쩔 수 없이 냉동 송이를 녹여 쓰면서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다”고 한다. 또 다른 고급 버섯인 능이 버섯도 같은 이유로 더욱 귀한 몸이 됐다. 가을 배추 역시 흉작에 포기당 1만원대, 2만원에 육박하면서 김장 대란이 예고된다.
지자체 축제 특수도 꼬여
가을 먹거리와 볼거리를 내세워 각 지자체가 내세운 축제도 곳곳서 파행을 빚고 있다. 모처럼 지역 경제를 살릴 기회가 날아가자 지역 상인과 주민들은 울상이다.
단풍은 최저 기온이 5도 아래로 내려가며 일교차가 커져야 제대로 붉게 물든다. 산림청은 “가을 더위가 물러가지 않으면서 단풍 절정이 당초 10월 중순~말에서 11월 초로 늦어지고, 아예 물들 때를 놓쳐 초록이 그대로 남는 지역도 속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남 구례 섬진강 벚나무 길의 경우 올해 폭염으로 낙엽이 이례적으로 빨리 져 단풍이 아예 실종됐다.
국화 같은 가을꽃이 제대로 피지 않는 지역도 속출한다. 주로 남부 지방이 그렇다. 지난달 경남 김해 활천 꽃무릇 축제는 폭염 탓에 꽃이 거의 피지 않아 축제를 망쳤고, 전남 신안도 퍼플섬 아스타 꽃축제를 취소했다.
지난달 말 충북 영동·괴산의 버섯 축제에선 대표 주자인 송이와 능이가 통째 사라져 축제가 무색해졌다. 이 지역 버섯 주산지 민주지산에선 9월부터 나왔어야 할 송이가 한 개도 나오지 않았고, 능이는 극소량 채취했으나 상품성이 떨어졌다고 한다. 3~6일 열리는 강원 양양송이연어축제에선 송이 채취 행사를 없애고, 사실상 노르웨이산 연어와 한우 등 다른 먹거리에 집중했다.
또 8~9월 충남 보령·서천과 전남 광양과 보성, 부산 등에선 전어 축제도 슬그머니 대하와 꽃게를 내세워 행사가 치러졌다. 전남 광양에선 전어 굽는 냄새 대신 전통 전어잡이를 구현한 퍼포먼스가, 경남 진해만에선 전어 치어 10만 마리를 방생하며 내년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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