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고산식물 800종 자생 자연 정원을 누비다 [융프라우 하더 쿨룸/쉬니케 플라테]
서울에 인왕산이 있다면 스위스 인터라켄에는 하더쿨름과 쉬니케 플라테가 있다. 두 곳 모두 산책하듯 가볍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고, 일몰과 야경 명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터라켄 도심에서 아주 가깝다. 환상적인 전망을 갖춘 레스토랑과 전망대, 반나절이면 풍경을 보며 오르내릴 수 있는 다양한 코스와 알파인 놀이터까지 알차게 갖추고 있다. 여행과 트레킹을 모두 즐기고 싶은 여행객이나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객에게 최적의 산이다.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 발코니 창을 열어젖혔다. 인터라켄 중심의 상점들과 엘리자베스 공원의 이른 아침 풍경이 펼쳐졌다.
'아! 꿈이 아니구나. 내가 지금 스위스에 있는 거야.'
지난 일주일 동안 '투르 드 몽볼랑Tour du MontBlanc' 트레일을 완주하고 이곳 인터라켄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오늘부터 시작되는 스위스 여행에 대한 설렘이 교차했다.
오늘은 툰과 브리엔츠 호수,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3대 미봉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하더쿨름Harder Kulm(1,322m)과 알프스 야생화가 만발하는 비밀의 화원 쉬니케 플라테Schynige Platte(2,068m)로 향한다.
오전 8시 40분, 산행을 함께할 융프라우철도 소속 가이드 도리스Doris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하더쿨름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레강을 건너는 다리에서 도리스가 멀리 바위를 가리켰다.
"저기! 사람 얼굴이 보이나요? 저기가 눈이고, 아래 코가 있어요."
뚫어져라 쳐다보니, 바위가 험상궂은 남자 얼굴과 비슷해 보였다. 도리스는 바위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었다. 옛날 수도원을 나와 파계한 성직자가 여자들을 쫓아다니며, 스토킹을 해 이곳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더쿨름 산에서 나무를 하던 여자를 쫓아갔고, 겁에 질린 여자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화가 난 산의 요정들은 그를 잡아 바위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올려다보았다. 도리스의 온화한 얼굴과 말투를 보면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도의 옛날이야기로만 들리는데, 마치 요즘 범죄 실화 같은 내용에 괜히 등골이 오싹했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아늑한 산길
하더쿨름은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산악열차인 푸니쿨라Funicular를 타고 간다. 하더쿨름 푸니쿨라역에서 첫 차를 탔다. 열차는 등반하듯 직벽에 가까운 경사를 안정적으로 올랐다. 천천히 오르다 터널 속으로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이었다. 해발 1,300m대까지 고도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적당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완벽한 순간을 준비해 놓은 드라마 촬영 스태프 같았다. 마음이 요동쳤다. 하더쿨름 전망대 방면으로 천천히 걸었다. 왼편으로 스위스 전통 의상을 입은 목각 인형들이 서 있었다. 알펜호른을 불고 있는 목각 인형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간단히 몸을 풀고 오른쪽 숲길로 들어섰다. 등산로 입구의 안내판에는 여덟 명의 요정이 커다란 얼굴을 옮기는 장면이 앙증맞게 그려져 있었다. 바위 얼굴 전설 안내판이었다. 몇 걸음 옮기자 올해 개장한 하더쿨름 알파인 놀이터였다. 숲을 좋아하는 여덟 살 조카가 떠올랐다. 언젠가 그 녀석 손을 잡고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어린이 정서에 도움이 될 만한 친환경적인 놀이터였다.
첫 갈림길, 등산로 안내판을 살폈다. 도리스는 노란색으로 표시된 안내판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초보자 추천 코스라고 했다. 산악 트레일의 경우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구분되는데, 빨간색은 산행에 익숙한 이들에게 적합한 코스로 등산화가 필수이고, 파란색 표시는 알파인 하이킹 코스로 등반 장비와 산악 가이드 동행이 필수라고 했다.
빨간색 안내판이었다. 우리는 숲속 깊이 들어갔다. '킁킁' 냄새를 자세히 맡고 싶을 만큼 흙과 나뭇잎의 향긋한 냄새가 짙어졌다. 문득 스위스 나무가 궁금했다. 도리스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하더쿨름 숲은 크리스마스 나무라 불리는 전나무silver fir가 가장 많아요. 단풍나무maple도 많고요. 그래서 가을에도 아름다워요."
이 숲에는 사슴과 여우, 산양이 있다고 했다. 산양은 무분별한 사냥으로 멸종되었다가, 이웃 나라 이탈리아에서 다시 가져다 번식시켰다고 한다. 산양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1년마다 한 마디씩 뿔이 자란단다. 도리스는 하더쿨름의 안주인마냥 모르는 것이 없었다.
숲길은 잘 닦여 있었다. 나무 그늘마다 시원한 바람이 간들거렸다. 그래서인지 산행은 힘들지 않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한국의 여느 숲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간간이 고개를 들면 멀리 만년설이 있는 알프스 봉우리들을 보곤 '맞다! 여기 스위스였지'라고 생각했다. 자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함께 걷는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그보다 고단한 길도 없을 것이다. 월간<산> 독자와 기자로 구성된 우리 일행 7명은 이심전심으로 모든 것이 잘 통했다. 나는 행복에 겨워 어깨가 들썩거렸다.
3km 남짓 짧은 산행을 마치고 하더쿨름 전망대로 돌아왔다. 절벽 위에 세워진 아찔한 전망대에 서자 툰호수와 브리엔츠호수, 엽서에 등장할 만큼 사랑스러운 인터라켄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전망대 끝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꺼이 그 행렬에 동참했다. 전망대와 레스토랑 일대에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레스토랑 앞에 설치된 결승선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늘 아침에 하더쿨름 역 앞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Start'와 'Ziel', 바로 융프라우 마라톤의 결승선이었다. 지엘Ziel은 '목표(지점), 목적, 뜻한 바, 의향'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푸니쿨라를 타면 10분 만에 오를 수 있는데 달려서 산을 오르다니! 어쩌면 그것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라켄에 다시 오게 된다면 이 숲속을 달리게 되기를 바랐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다시 이곳에 올 날을 상상했다. 그러다 문득 이 순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시간이 더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했다.
하더쿨름을 오가는 푸니쿨라는 해가 진 뒤에도 운행한다. 일몰과 야경을 즐기거나 파노라마 레스토랑에서 스위스 전통 요리를 느긋하게 맛보는 것도 좋다고 했다. '다음에 오면 저녁에 와야겠다'며 자꾸만 기약 없는 다음을 상상했다.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빠르게 내려가는 길, 열차 창문 밖으로 호수 너머 오후에 걸을 곳을 찾아 눈을 두리번거렸다.
인터라켄 오스트OST 역에서 열차에 오르자마자 다음 역인 빌더스빌Wilderswill에서 하차했다. 빌더스빌은 쉬니케 플라테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마을이다. 쉬니케 플라테를 오가는 열차는 융프라우의 다른 열차들과 달랐다.
뭔가 더 고풍스럽고, 예스러웠다. 창문이 반쯤 열려 창밖으로 부는 바람을 그대로 맞을 수 있는 오래된 산악열차였다. 무려 1893년부터 운행한 산악열차라니! 저 멀리 열차가 선로로 들어섰다. "터덜터덜, 터덜터덜" 소리를 내는 열차는 느렸다. 아마도 스위스에서 타 본 열차 중에 가장 느린 것 같았다.
빌더스빌은 가이드 도리스가 살고 있는 마을이기도 했다. 그녀는 창밖으로 자기의 집이 저기에 있노라고 연신 가리켰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많은 집 중 어느 곳이 그녀의 집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라도 좋아 보였다. 나무와 풀, 꽃을 보듬어 싼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여유롭고 낙천적이었다. 마침 어디선가 워낭소리가 울렸다. 워낭소리와 터덜거리는 기차 소리가 어우러졌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꼭 천국에 있는 듯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바람과 풍경을 만끽했다. '이렇게 느려서 오늘 중에 갈 수 있으려나' 싶은데 열차는 내리기 아쉬울 만큼 빠르게 도착했다. 하더쿨름에 알펜호른 목각 인형이 있었다면 쉬니케 플라테에는 진짜 알펜호른 부는 여인들이 있었다.
기차역의 열차 소음이 멀어지고 알펜호른 연주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한편으로 연주를 감상하며 한편으로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파노라마 레스토랑으로 홀리듯 걸어갔다. 산악 호텔 2층 난간에는 노란색 파라솔이 늘어서 있었다.
곳곳이 '뷰 포인트'이자 자연 시네마!
사람들은 이 레스토랑을 두고 '샤이닝 플레이트Shining Plate', 곧 빛나는 접시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가 아래에서 바라보면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라고. 알프스 구경도 식후경이라! 우리는 이곳에서 오찬을 즐기기로 했다. 바삭한 튀김이 일품인 비엔나슈니첼Wienerschnitzel과 싱싱한 채소 샐러드에 맥주 한 잔을 곁들였다.
"자! 이제 하이킹을 시작해 볼까요. 아이거와 묀히, 융프라우 봉우리를 대형 액자를 통해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다우베Daube를 끼고 돌아 알파인 가든으로 내려올 거예요. 내일 피르스트까지 가는 장거리 하이킹이 있으니, 오늘은 가볍게 걸어보죠!"
우리는 저마다 몸을 풀었다. 산책로를 따라 5분 남짓 오르자 안내판이 보였다. 이곳부터 다우베 뷰 포인트까지 약 25분. 우리는 안내판에 적힌 시간에 20~30분을 더했다. 왜냐하면 풍경도 즐겨야 했고, 사진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 시네마라 불리는 대형 액자를 통해 바라본 알프스 풍경은 비현실적일 정도였다. 우리는 너도나도 나무 액자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다. 도리스는 연신 사진을 찍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우베로 향하는 모든 곳이 '뷰 포인트'였다. 아늑하고 고요했던 하더쿨름 숲길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방으로 탁 트인 진묘한 풍경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거닐었다.
다우베를 끼고 돌아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좁은 자갈길이 이어졌다. 저 멀리 농장 몇 채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보였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나는 양팔을 벌리고 춤을 추듯 걸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방이 밝았다. 낮이 밤보다 길어 좋았다.
알파인 가든에 도착하자 꽃처럼 고운 이름을 가진 자스민Jasmin이 우리를 반겼다. 그녀는 이곳의 정원사로 2007년부터 알프스 식물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했다. 쉬니케 플라테(2,068m)의 알파인 가든은 1927년에 설립되었으며, 800여 종의 야생화와 고산식물을 수집하고 보존하며 연구한다. 스위스 알프스의 식물 생태계를 연구하고 보전하는 과학적 연구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여러 꽃의 이름과 특징에 대해 부지런히 설명했다. 그중 흥미로운 식물 중 하나로 옐로 젠티안Yellow Gentian이 있다. 그녀는 이 꽃을 '게으른 정원사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 소개했다. 젠티안은 70~100년 동안 정원사가 자주 손을 보지 않더라도 무척 잘 자라는 식물이라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옐로 젠티안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젠티안 뿌리는 비터 루트Bitter Root 또는 겐치아나Genciana라고 하여 전통적으로 소화가 되지 않을 때 조금씩 차로 마셨다고 한다. 속이 더부룩할 때마다 엄마가 챙겨 주신 매실액이 떠올랐다. 불현듯 엄마와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녀는 아웃도어와 하이킹을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아르니카Arnica'도 소개해 주었다. 아르니카는 국화과 식물에서 추출한 것으로 부종이나 염증, 근육통, 통증 등에 사용됐다고 한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손바닥을 쫙 편 채 자스민에게 내밀었다. 알싸한 꽃향기가 바람결에 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행이 끝났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감미로운 알펜호른 연주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알프스의 눈부신 풍광이 나타날 것 같기도 하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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