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700명 등장하는 K드라마 원조”… 10년 만에 일본어 완역

김소민 기자 2024. 10.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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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자 시미즈씨… 대학서 한국어 전공 후 기자 근무
블라디보스토크-간도 등 직접 찾아
“탐욕에 눈 먼 조준구도 사정 있어
사람을 한쪽만 볼 수 없단 걸 배워”
토지 일본어판 번역가 시미즈 치사코 씨는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주갑’을 꼽으며 “어디 매인 게 없는 자유인이자 속이 깊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생전 박경리 선생님도 주갑을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토지’는 불륜, 사랑, 질투, 시기, 살인, 치정, 복수에 이르기까지 700여 명의 다양한 삶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흥미진진해서 ‘K드라마’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20권(사진)을 최근 공동으로 완역한 일본어 번역자 시미즈 치사코 씨(56)는 ‘토지’의 매력을 이렇게 말했다. “교정 때만 (전권) 3번을 읽었고 번역 작업 때까지 포함하면 세기 어려울 정도로 ‘토지’를 탐독했다”는 그는 공동 번역자인 요시카와 나기 씨와 함께 진행한 토지 20권 전권의 일본어 번역 작업을 올해 마쳤다. 2014년 번역에 착수한 지 10년 만. 일본어판 ‘토지’의 마지막 권은 지난달 30일 현지에서 출간됐다.

일본어판 전권 출간을 나흘 앞둔 지난달 26일 서울에서 만난 시미즈 씨는 여러 감정이 혼재된 느낌이었다. 그는 다양한 사투리 표현과 방대한 역사적 배경에 번역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작품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 10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탐욕에 눈이 먼 조준구도 아들 조병수를 통해 보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700여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을 보면서 ‘사람을 한쪽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걸 배웠습니다.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에게 추천하고 싶네요.”

두 번역자가 교체 없이 뚝심 있게 번역했기에 주인공 서희 등 등장인물들의 어투 등을 일관성 있게 옮길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미즈 씨는 서희가 광복 소식을 듣고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 결말 장면에 빗대 “10년의 대장정을 마쳤을 때 어깨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고도 했다.

일본 오사카 외국어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요미우리신문에서 15년간 기자로 일한 그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김하나·황선우) 등을 일본어로 옮긴 번역가. 그는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작품 배경이 되는 경남 하동군을 비롯해 중국 간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등을 종횡무진 누비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송정 푸른 솔은’을 부르며 의지를 다진 중국 용정의 비암산 소나무도 보고 왔다고. 시미즈 씨는 “제가 ‘토지’ 번역가니까 갔지 그런 데가 있는지도 몰랐다”며 “이젠 역사를 볼 때 일본, 한국만 보는 게 아니라 아시아를 보게 된다. 아마 ‘토지’의 힘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토지’ 독자들을 대상으로 답사 사진들을 보여주며 강연도 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토지’에 소위 미쳐 있던 그였지만 처음에는 번역을 망설였다고 한다. ‘토지’가 반일(反日) 소설이라는 일각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번역 제안을 받고 고민하던 중 당시 토지학회 회장이던 최유찬 연세대 교수를 만난 뒤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최 교수님이 ‘토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이다. 반일 소설로 읽는 건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용기를 얻었어요. 실제 번역해 보니 일본인을 나쁘게 그리는 장면도 있지만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고, 작가가 일제와 개인을 구별해 그리려고 한 것이 보입니다.”

‘토지’의 일본 내 관심은 높다. 1, 2권이 동시 출간된 2016년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지정됐고, 아사히·요미우리·마이니치 등 주요 신문이 비중 있게 보도했다. “어떤 나이 드신 분이 엽서를 보내왔는데 ‘눈이 점점 안 보이고 곧 죽을 수도 있으니 번역을 서둘러 줬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시미즈 씨는 올 8월 마지막 퇴고 작업을 하며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 3주간 머물렀다. 당시 근처 버스정류장에 박 작가의 시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작가들을 엄마처럼 지켜보는 따뜻한 마음을 표현한 시였어요. 그걸 보면서 선생님이 거기 계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회촌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가면/그들도 어엿한 장년 중년/모두 한몫을 하는 사회적 존재인데/우습게도 나는/유치원 보모 같은 생각을 하고/모이 물어다 먹이는/어미 새 같은 착각을 한다’(박경리 ‘산골 창작실의 예술가들’ 중에서)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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