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성(26)이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다.
지난 일요일, LA 다저스는 김혜성을 메이저리그에 승격시켰다. 시범경기 이후 계속 트리플A에 머물렀는데, 마침내 메이저리그 부름을 받았다.
이번 승격은 토미 에드먼의 부상에서 비롯됐다. 에드먼이 오른쪽 발목 염증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공백이 생겼다. 그러면서 에드먼처럼 내/외야를 모두 볼 수 있는 김혜성이 선택됐다. 김혜성은 트리플A에서도 유격수와 2루수, 중견수로 나왔다.
트리플A
김혜성은 트리플A에서 28경기 출장했다. 131타석 타율 .252 5홈런 13도루, OPS 0.798을 기록했다.
출발이 좋았다. 시즌 첫 13경기 타율 .293, OPS 0.963으로 펄펄 날았다. 4월12일 경기에서 첫 홈런을 친 데 이어 다음날 멀티 홈런 경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후 15경기는 57타수 12안타로, 타율 .211에 그쳤다.
트리플A에서 눈에 띄는 기록은 몇 가지 있었다.
김혜성은 공을 보는 것보다 치는 것을 선호했다. 타석 당 볼넷률이 7.6%로 낮은 편이었다. KBO리그 통산 볼넷률도 높진 않았지만(8.5%) 바뀐 타격폼이 최대한 몸에 배도록 했다. 애초에 다저스가 김혜성을 내려보낸 것도 타격폼 수정이 주된 이유였다. 로버츠 감독 역시 "메이저리그 투수들에게 더 잘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파워를 늘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레그킥을 없애면서 타이밍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전보다 강한 엉덩이 회전으로 타구에 힘을 실었다. 이에 김혜성은 트리플A에서 순수파워(ISO)가 .217로 높은 축에 속했다. KBO리그 통산 순수파워는 .099에 불과했다. 뜬공이 홈런으로 연결된 비율도 트리플A 퍼시픽코스트리그(PCL)에서 4번째로 높았다.
PCL 홈런/뜬공 비율 (100타석)
37.5% - A J 부코비치
28.6% - 채드 스티븐스
24.1% - 라이언 워드
23.8% - 김혜성
<스탯캐스트>는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타구 정보도 제공한다. 타자가 생산한 타구의 질은 중요한 지표로 여겨지고 있다. 타구의 질이 뛰어나면 실제 성적이 다소 떨어져도 언젠가는 좋아질 것으로 내다본다. 이를 기반으로 마련된 지표가 기대 타율(xBA)과 기대 장타율(xSLG) 등이다. 타자를 평가함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지만, 타자의 현 상태와 향후 성적을 추측하는 증거로 쓰인다.

김혜성은 트리플A에서 타구의 질은 리그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트리플A 평균 타구속도가 87.1마일이었다. 리그 평균 88.8마일보다 느렸다. 95마일 이상 타구(hard hit)의 비율도 김혜성은 30.5%, 리그 평균은 39.6%였다. 물론, 김혜성은 잘맞은 타구가 아니어도 살아나갈 수 있는 스피드를 갖춘 점을 참작해야 한다.
좌완을 상대로 크게 밀리지 않은 점은 고무적이다. 표본은 많지 않지만, 25타수 6안타로 타율 .240, OPS 0.827로 준수했다. 좌타자가 좌완에게 고전하면 활용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데, 김혜성은 어느 정도 경쟁력을 보여줬다.
의미
메이저리그 감독과 코치진은 정기적으로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리포트를 받는다. 프런트도 상황을 예의주시한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결원이 생기면 우선순위를 정한다.
로버츠 감독은 김혜성에게 우호적이었다. 작년 서울시리즈 때부터 김혜성을 보고 호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판단은 냉정했다. 김혜성이 당장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후 부진한 선수가 나올 때마다 김혜성이 거론됐지만, 다저스는 김혜성에 관한 결정을 신중하게 내렸다.
당초 김혜성이 넘어야 할 선수는 앤디 파헤스로 보였다. 파헤스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내리고 메이저리그에 남았다. 다저스는 파헤스에게 호쾌한 한 방을 기대했다.
하지만 파헤스는 시즌 초반 타격감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시즌 20번째 경기 동안 타율이 .159밖에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 수비도 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파헤스를 위기에서 지켜준 건 로버츠 감독이었다. 로버츠 감독은 "100타석 이상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 결정한 이상 그 결정을 쉽게 바꾸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로버츠 감독의 신임을 확인한 파헤스는 이후 7경기 29타수 17안타(.586) 4홈런을 몰아치며 '이 주의 선수'로 선정됐다. 공수에서 균형 잡힌 활약으로 시즌 성적을 크게 끌어올렸다.

다저스는 파헤스가 부진해도 김혜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드먼이 부상으로 이탈하자 김혜성을 불러올렸다. 이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다저스는 김혜성의 타격이 메이저리그에서 얼마나 통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김혜성의 트리플A 성적이 특출나다고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적응 과정에서 달라진 모습이 있었지만, KBO리그 시절에 비해 달라진 정도였다. 다저스는 '현재 김혜성'이 누군가의 대체자로 거듭나기엔 아직 이르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 김혜성'을 시즌 구상에서 배제하진 않았다. 부상자가 발생하면 가동하는 '플랜 B'에는 들어간 것이다. 순서를 막론하고 김혜성에게 기회가 주어진 건 의미가 있다.
그 기회가 얼마나 주어질지는 미지수다. 에드먼의 발목 부상은 심각하지 않다는 소식이다. 최소한의 기간만 빠지고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보통 부상자가 돌아오면 그로 인해 올라왔던 선수가 다시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LA 타임스>도 에드먼이 복귀하면 김혜성이 빠지는 쪽에 무게를 뒀다.
즉, 김혜성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이 계획을 흔들어야 한다.
무력시위
로버츠 감독은 김혜성을 곧바로 선발로 기용하지 않았다. 첫 두 경기는 대수비와 대주자로 나섰다. 눈도장을 찍기 힘든 포지션이다.
놀라운 건 김혜성이 그 힘든 것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5월5일 애틀랜타전 9회 대주자로 나와 2루 도루에 성공했다(4.31초가 걸렸다). 여기에 윌 스미스의 낫아웃 삼진으로 1루에 공이 전달되는 사이 2루에서 3루로 내달렸다. 비록 다저스는 패했지만, 김혜성의 주루 플레이는 상당히 화제가 됐다. 현역 시절 주루 플레이에 일가견이 있었던 로버츠 감독도 김혜성을 크게 칭찬했다. 대도는 대도를 알아보는 듯 했다.
스피드를 앞세우는 선수는 양날의 검이다. 성공하면 득점을 이끌지만, 실패했을 때 타격이 너무 크다. 또 대주자들은 곧바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조급해진다. 상대도 대주자들이 노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임무 완수가 더 어렵다. 그래서 경기를 재빨리 읽는 순발력이 중요하다. 동시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도 있어야 한다.
김혜성은 첫 대주자 출장에서 이 모습을 다 보여줬다.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도 돋보였다.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던 로버츠 감독은 다음 마이애미 시리즈 선발 출장을 예고했다.

로버츠 감독은 약속을 지켰다. 어제 김혜성은 메이저리그 데뷔 첫 선발 출장을 했다. 상대 선발은 2022년 사이영상 수상자 샌디 알칸타라였다.
김혜성은 첫 타석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불리한 카운트(3-1)에서 99마일 싱커를 걷어올렸다. 메이저리그 최상위 구속에도 날카로운 타구를 만든 점이 인상적이었다.
첫 안타가 아쉽게 무산됐지만, 그 아쉬움이 오래가진 않았다. 김혜성은 두 번째 타석에서 바깥쪽 97마일 포심을 밀어쳐서 첫 안타를 신고했다. 다음 타자 오타니 쇼헤이의 타석 때 2루 도루에 성공했고, 오타니의 홈런으로 데뷔 첫 득점을 기록했다. 오타니는 오늘 경기 전까지 홈런 8개에도 불구하고 11타점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만큼 오타니 앞에 주자가 깔리지 못했는데, 김혜성이 그 연결고리 역할을 완벽하게 해줬다.
김혜성은 세 번째 타석에서 바뀐 투수 타일러 필립스의 체인지업을 툭 건드려 또 하나의 안타를 추가했다. 이 안타는 2루주자 파헤스를 불러들이는 적시타였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상대 투수의 잘 떨어진 체인지업을 감각적으로 대처한 타격이었다.
김혜성은 시즌 첫 선발 출장에서 4타수 2안타 1타점 1도루를 기록했다. 9번 타순에서 생동감 넘치는 활약으로 팀 승리에 기여했다. 경기 후 여러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팀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다저스에 자신의 필요성을 몸소 보여줬다.
지금으로선 다저스의 계획이 얼마나 바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들이 겹겹이 쌓이면 다저스는 김혜성에게 충분한 기회를 줄 것이다. 김혜성의 운동 능력과 잠재력을 믿었기 때문에 3년 계약을 안겨줬다. 다저스는 분명 김혜성을 하나의 승부수로 보고 있다.
김혜성이 꿈꾸던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뤘다. 힘든 시간은 있었지만,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이제 그 다음 목표는 메이저리그에서 생존이다.
일단, 첫 걸음은 힘차게 내딛었다.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