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 김희선 “세상의 길은 한 갈래뿐이라고 생각하나요?”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저 안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어느 날, 오래된 가게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엉뚱한 상상력이 더해졌다. 만약 공기압으로 움직이는 기압 운송선을 실제로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압 운송선은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해 압력 차이를 없애려고 하는 공기 성질을 이용한 구상으로, 지하철이 상용화되기 전인 100여 년 전 유럽에서 제작이 시도됐다가 실패한 바 있다. 만약에 기압 운송선이 빛보다 빨리 달려서 시간까지 거슬러 가게 된다면⋯.
시간 여행자가 된 시계공 아버지와, 그의 사연을 모르는 자식의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김희선의 단편SF 「공간 서점」은 구도심의 시계방에서 걸어 나왔다. 실종된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사설탐정이 과거 천금당으로 불린 시계방이었던 고서점을 찾아온다. 시계방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쫓겨 가게로 들어온 청년으로부터 무언가 만드는 법이 담긴 책을 건네받지만, 청년은 가게를 나선 뒤 최루탄 파편에 맞아 쓰러진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사라지고, 시계방 자리에는 ‘공간 서점’이란 중고 책방이 자리해 있다. 책방 주인 청년은 찾아온 사설탐정에게 말한다.
“혹시 세상에 길은 한 갈래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고 지금 이곳도 그중 하나일 뿐이지요. 길이 반드시 한 갈래로만 뻗어 있다고 믿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40-43쪽)
현직 약사인 소설가 김희선이 「공간 서점」을 비롯해 단편SF 8편을 묶은 SF소설집 『빛과 영원의 시계방』(허블)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이자 첫 SF소설집.
작품들은 양자론적 다세계론이나 시뮬레이션 우주론, 시간 여행이나 마인드 업로딩 등 다양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한국사와 세계사는 물론 현실의 여러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간관을 가진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 다른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치 태엽처럼 맞물려 정교하게 작동하는 서사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째깍째깍.
김희선은 이번 SF소설집에서 그린 세계는 어떤 모습이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갈까. 김 작가를 지난 2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공간 서점」의 시계공 아버지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소설의 과학적인 배경은 어떤 하나의 이벤트가 일어날 때마다 우주가 계속 갈라진다고 하는 양자론적인 다세계 같은 것이다. 시계공 아버지가 과거로 돌아가 청년을 대신해 최루탄을 맞았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죽은 우주가 있을 수 있고, 아버지가 살아남은 우주 역시 있을 수 있다. 의뢰인이 차 안에서 깜빡 졸 때 아버지가 문을 두드린 건 아버지가 산 우주에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각각 다른 우주가 어떤 이유로 잠깐 통로 같은 게 열려서 아버지가 자식이 잘 지내는지를 잠시 확인할 수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열어두고 싶었다.”
―사설탐정인 나는 왜 의뢰인에게 별다른 게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지.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어떤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서 하고 싶은 뭔가를 간직하고 있고, 소설 속의 탐정 역시 마음속에 어떤 후회가 됐거나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이야기는 탐정이 시계방의 지하로 내려가서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가려 하는 데서 끝난다)

“오래 전 가스통을 들고 시위하는 할아버지들이 뉴스를 통해서 볼 때마다 여러 생각을 했다. 약국을 할 때도 빨간 조끼를 하거나 갈고리를 한 참전용사나 상의용사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어떤 생각이 밀고 와서 그들은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자신들이 어디에선가 세뇌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밀려온 건 아닐까. 여기에 YH여공 사건도 결합됐다. 당시 고용주나 국가는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문화나 노동자를 원했던 것 같다. 그것을 강요한 사람들도 결국 자동인형 같은 존재였을 수 있다.”
―독자와 무엇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나.
“노동이나 일하는 환경에서 압박받는 오토마톤이 있을 수 있고, 미디어나 sns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될 것 같아서 끌려가는 오토마톤이 있을 수 있다.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조금 다른 시각으로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울러 과거에 이런 일,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한 번 더 환기하고 싶었고, 뭔가를 잊지 않고 기록하고 싶은 느낌도 있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가 특별히 추천한 「꿈의 귀환」은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꾼 꿈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꿈의 지도를 완성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꿈의 지도를 위한 과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되는 도중, 이론 물리학자 앨런 교수의 강연에서 놀라운 반전을 맞는다.
“오래 전 사라진 지구와 가가린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우리들. 누군가는 말하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이의 꿈에 불과하다면, 거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계속하여 삶을 영위해 나갈 이유를 내포합니다. 꿈이든, 생시든, 무언가가 존재할 확률은 언제나 제로에 가깝고, 우린 그 엄청나게 작은 확률을 딛고 여기 이렇게 서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157쪽)
―앨런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홀로그램 우주라면 우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 『전쟁의 집』을 읽었을 때 상상을 했다. 1960년대 후반 쿠바 위기 때 정말 지구가 사라지고 마침 지구 밖에 나가 있던 가가린만 살아서 잠든 채로 지구를 꿈꾸고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쩌면 어떤 사람의 꿈일 수 있다는 가정은 보르헤스의 소설을 비롯해 자주 등장한다. 저는 그 꿈의 주체를 유리 가가린으로 생각한 것이다. 가가린은 전투기 추락으로 숨졌는데, 여러 음모론을 찾아보면서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우리가 꿈속의 존재라고 하더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존재할 가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홀로그램 우주나 시뮬레이션 우주론처럼 우리보다 훨씬 발전한 문명이 우리를 일종의 가상현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중요하고 가치 있다.(영화 「매트릭스」에선 가상의 현실을 깨고 나오라고 말하는데) 만약 「매트릭스」처럼 우리가 정말 짜여진 가상현실 속의 존재라면 매트릭스라는 틀을 깨야 하겠지만, 우리가 가상인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우리가 시뮬레이션 우주에 있고 그것을 모른다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이 느낌이 중요할 것 같다.”
「달을 멈추다」는 월명사의 향가 「제망매가」를 배경과 모티브로 한 작품. 나는 사라진 영주를 찾기 위해 타임 슬립을 통해 월명사 스님을 찾아가고, 전생에 월명사였다는 것을 깨달은 스웨덴 군나르 순드베리는 영혼들의 커뮤니티를 만든다. 나는 월명사의 피리소리를 들으면서 윤회가 무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꽃잎을 하나 움켜쥐고 귀환 버튼을 누른다.
―향가 「제망매가」가 주요한 배경이나 모티브가 됐는데.

“두 번째 소설집을 낸 뒤 발표한 작품 가운데 SF계열에 속하는 작품만 골라서 묶은 첫 SF소설집이다.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설집에도 에스에프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들이 다른 소설과 함께 묶여 있어서 일반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은 독자들은 이게 뭐지, 하고 조금 낯설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아예 에스에프 소설집으로 묶여 나와서 독자들이 더 다가가기 쉽지 않을까, 작품이 더 깊게 이해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현실 속에서 존재감이 없던 소년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는 우연히 『끝없는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위험에 처한 환상 세계를 구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간다. 소년은 책 안에서 온갖 환상적인 모험을 하게 되면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게 되는데⋯. 춘천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여학생 김희선은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아동 판타지 『네버엔딩 스토리』를 집어들었다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에서 놓질 못했다.
그는 이미 어릴 때 집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한 독서 소녀. 추리 소설과 SF를 좋아했고, 『15소년 표류기』를 비롯해 모험 소설도 좋아했다. 소설만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온갖 책을 읽었다. 용돈이 생기면 책을 샀고, 선물을 받을 일이 있으면 책으로 받았다. 가끔 서울에 오면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사기도 했다. 책방에 가면 행복했던 소녀였다.
이런 활자 중독 소녀가 책 『네버엔딩 스토리』의 분위기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으니. 책 속의 환상적인 이야기와 책 밖에서 책을 읽는 사람간 묘하게 상호작용하는 듯한 느낌. 책을 덮는 순간 또다시 새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결말⋯. 뭐라도 쓰고 싶었다. 소설가 김희선의 씨가 뿌려진 때였다.
“『네버엔딩 스토리』는 저에게 깊은 인상을 줬어요. 나도 이야기를 써봐야지. 소설을 읽고 난 뒤, 저도 뭔가 쓰기도 했고요. 이상한 사막에서 모험하는 남매 얘기를⋯. 지금도 영향을 계속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되돌아보니, 제가 마치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면서 끝나는 소설을 많이 쓴 것 같아요.”
그럼에도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고서 자신이 읽고 생각한 모험 이야기와 너무 달라서 작가가 될 생각을 접었고, 고교 1학년 땐 SF영화 「로보캅」을 보고선 로봇을 만들고 싶어서 이과로 전과한 뒤, 고3쯤 약대로 진로를 변경한 그였다. 인생 역시 네버엔딩 여행이니까.
공부나 해볼까. 2008년 개업 약사 생활을 접고 월급을 받는 ‘관리 약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방송통신대 국문과 3학년에 편입했다. 국어 공부가 재미있었다. 내친 김에 2011년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입학, 소설 창작반에 들어가서 습작을 시작했다.

“실제적이든 관념적이든, 우리가 보고 있고 알고 있고 믿는 세상의 뒷면에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다른 세상, 그러니까 다른 세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에 숨겨진 그림자일 수도 있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나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세상을 다 안다고 믿지 말고, 그 뒷면을 보고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풍요롭기도 하고, 더 이해하기도 쉽고, 타자든 또는 다른 세상이든 더 깊이 공감하면서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더 깊이 있게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말을.”
―소설 쓰기의 방법이나 원칙이 있다면.
“문장이나 문체를 막 쓰는 건 아니지만, 소설 형식이나 구조는 내용에 맞춰서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내용이 있다면 거기에 맞는 구조나 형식을 저절로 찾아내서 쓰게 된다는 점에서, 제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고, 등장인물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저는 약국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연을 듣지만, 그것을 절대로 소설로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 속 인간의 진정성을 제가 소설로, 허구로 가공하는 건 제 생각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든 인물이든 진정성을 잘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때는 SF라는 형식이 필요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스릴러의 형식이 필요할 때도 있고.”
―SF 및 장르소설과 순문학을 쓸 때 차이를 느끼지 않는가.
“저의 경우 별 차이를 못 느낀다. 예를 들면, 「가깝게 우리는」의 경우, 자동인형 같은 삶을 산 줄도 모르고 살아온 가스통 노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SF적 배경이 필요했다. 문학의 장르 구분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마 순문학과 장르문학 다 읽어서 그런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것은 SF를 써야지, 이것은 순문학을 써야지, 이것은 스릴러를 써야지, 이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이 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 방식이 좋겠다고 생각해 쓸 뿐이다.(그 비중은) 지금까지 쓴 단편만으로 보면 얼추 반반 같다. 스릴러까지 포함하면 장르 쪽이 3분의 1.7 정도.”
―병원에서 관리 약사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데.
“하루를 풀로 근무하는 것도, 근무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아주 힘들진 않다.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입원 환자의 약을 조제하거나 향정신성 의약품이나 마약류 관리. 관리 약사의 일과 소설 창작이 서로 완전히 달라서 오히려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다. 소설가의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고 창의적인 쪽이라면, 약사 일은 매우 정확하고 엄밀해야 한다. 약사 일을 규칙적으로 함으로써 소설을 쓰던 머리를 식힌다면, 소설을 쓸 때에는 몰입해 상상하며 쓰니까 약사로서의 정해진 일을 식히게 된다. 어렵다기보단 서로 좋게 작용하는 것 같다.”
절대로 실수 없이 정확하게 조제해야 하는 약사의 일과,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확하게 산책했다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일화에서 이름을 따온 강아지 칸토를 꾸준하게 산책시키는 일 사이에서, 마치 시계처럼 정확한 김희선의 소설들은 태어난다.
정확한 약사의 일과 꾸준한 칸토의 산책이 모두 끝난 뒤에, 또는 근무 시간이 바뀌어서 반대 순서로 정확히 이뤄진 뒤에, 그는 저녁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의 세계를 찾아 나설 것이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세계를. 책 속으로 뛰어든 소년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처럼. 그리하여 소설가 김희선의 원주 집에선 밤마다 정확한 소설의 시계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째깍째깍~ 째깍째깍~.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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