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피카소가 사라진 이유는
서울을 새로운 아트 허브로 만들려던 프리즈의 계획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피카소가 사라지고 대신 들어온 건
프리즈 서울이 한국에 진출할 때 큰 화제를 모았던 이유 중 하나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2022년 첫 프리즈 서울에서는 무려 600억 원에 달하는 피카소의 ‘술이 달린 붉은 모자를 쓴 여자’가 전시되었고, 지난해에도 피카소의 종이 드로잉 작품과 샤갈의 '신랑신부'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는 피카소를 비롯한 이른바 거장들의 작품이 사라졌습니다. 미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가 그 이유일 수 있고요. 고가 작품보다는 합리적인 가격대의 작품에 더 관심이 쏠린다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일각에선 미술 축제도 경제 불황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 프리즈 서울에 직접 방문했던 소감은 조금 달랐습니다. 백남준의 작품들이 주요 공간을 차지하고,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 앞에서 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보면서요. 프리즈가 서울을 새로운 글로벌 아트 허브로 만들려던 전략이 이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뉴욕, LA 그리고 서울
프리즈 서울의 지향점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프리즈라는 이름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분들도 있을 텐데요. 프리즈는 2003년 런던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아트페어로, 그 규모와 영향력은 아트 바젤과 함께 세계 양대 아트페어로 꼽힙니다. 여기서 아트페어는 쉽게 말해 예술 작품을 사고파는 '미술 장터'를 말합니다. 여러 갤러리가 모여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기 때문에, 예술 작품을 구매하려는 컬렉터들이 한 곳에서 여러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하고요.
아트 바젤은 이미 2013년 홍콩에서 '아트 바젤 홍콩'을 개최하며 아시아 시장 공략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 그 리고 후발 주자인 프리즈는 아시아에서 아트 바젤과 경쟁하기 위해 2022년부터 서울을 선택했고요. 특히 프리즈는 5년간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키아프(KIAF)와 공동 개최하며, 서울을 글로벌 아트 시장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프리즈가 서울을 선택한 이유는 물론 갤러리와 미술관 등 예술 관련 인프라가 풍부한 곳이기도 했지만요. 무엇보다 서울이 K-팝을 비롯하여 K-뷰티, K-패션에 이르기까지 트렌드를 주도하는 힙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트페어는 일종의 오픈마켓이기 때문에, 더 많은 판매자(갤러리)와 상품(작가와 작품), 그리고 고객(콜렉터)들을 모아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부동의 글로벌 1위 갤러리인 가고시안이 백남준의 설치 작품을 전면에 내세우고, 김윤신, 이불, 서도호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아시아의 작가들을 주요 갤러리들이 소개한 건 상당히 의미 있는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울을 선택하면서 꿈꿨던 새로운 시장 개척이 슬슬 성과를 보이고 있다는 걸 뜻하거든요.
더 나아가, 도쿄와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에 기반을 둔 갤러리들이 이번 프리즈 서울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메가 갤러리들과는 달리, 이들 로컬 갤러리들은 현지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더 중점을 두는데요. 이를 통해 프리즈는 기존 메가 갤러리에는 아시아 미술계의 신선함을 수혈하며, 아시아 갤러리들에게는 더 많은 판매 기회를 제공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프리즈 서울은 단순히 서울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를 넘어, 아시아 미술 시장 전체를 활성화하고 성장시키는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따라서 거장들의 작품의 존재감이 옅어진 건, 오히려 프리즈 서울 만의 색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트페어에 가야 하는 이유
그리고 올해에도 프리즈·키아프 서울에는 전년 대비 다소 증가한 약 8만 2천여 명의 방문객 수를 기록하며 흥행을 이어갔습니다. 피카소 같은 거장의 작품이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빠졌음에도 방문자 수는 오히려 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프리즈가 추구하는 방향이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 세계적으로 미술 시장이 침체된 가운데, 이런 결과는 단순히 ‘선방했다’고 넘길 수 없는 성과입니다. 프리즈 서울이 대중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보다 넓은 예술 시장의 저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도 아트페어를 찾을까요? 아트페어의 가장 큰 매력은 세계 각국의 주요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작품을 꼭 구매하지 않더라도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문화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아트페어의 매력은 그 이상입니다. 예술은 대중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트렌드와 흐름을 파악하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최근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나 흑인 작가들이 주목받는 흐름 역시 대중문화와 맥을 같이 한다는 걸 잘 보여주고요. 이러한 이유로 많은 기업들이 아트페어에 후원사로 참여하곤 합니다. 2년 연속으로 공식 헤드라인 파트너로 참여한 LG전자는 기술 혁신을 예술적 경험으로 승화해 브랜드 가치를 높인 좋은 예입니다.
프리즈 서울은 이처럼 단순한 아트페어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K-컬처, K-뷰티, K-패션과 같은 한국의 문화적 흐름과 맞물리며 한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고 있죠. 프리즈 서울은 이를 통해 예술 시장뿐 아니라 소비재 시장에서도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5년간 공동개최를 약속한 키아프와의 협력은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는데요. 프리즈의 최고 경영자는 계약 연장 가능성을 시사하며, 서울을 아시아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앞으로도 프리즈 서울을 통해 아시아 예술 시장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고, 그 과정에서 한국이 글로벌 트렌드를 어떻게 이끌어갈지 지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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