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행:사이다 대신 눈물…'경주기행' 네 모녀의 처절한 복수가 남긴 여운

사적 복수극은 대개 치밀하고 서늘한 칼날을 품는다. 빈틈없는 설계, 냉혹한 살의, 피비린내 나는 단죄의 쾌감이 장르의 주된 연료다. 하지만 김미조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경주기행'은 그 익숙하고 단단한 장르적 관습의 문법을 정면에서 배반한다.
8년 전 수학여행 길에서 막내딸이자 동생인 '경주'를 잃은 네 모녀가 출소한 가해자를 처단하러 낡은 봉고차에 몸을 싣는 여정 속에서, 영화는 이 비극적인 피의 복수극을 차가운 활극 대신 어설프고 눈물겨운 '여성과 가족 주체의 로드무비'로 치환해낸다.
'삑사리'와 실수 연발…봉준호의 향취가 묻어나는 어설픔의 미학
'경주기행'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정서는 뜻밖에도 엉뚱한 해학과 생생한 인간미다. 완벽한 킬러나 냉혈한 범죄자와 거리가 먼 네 모녀의 작전은 출발부터 삐걱거린다.
알리바이를 맞추려다 길을 잃고, 비장한 결의 끝에 치명적인 '삑사리'와 어설픈 실수가 잇따른다.
이러한 순간들은 결정적 순간마다 예측을 빗겨 나가며 장르의 전형성을 비틀던 봉준호 감독 특유의 디테일과 해학적 냄새를 짙게 풍긴다.
억지스러운 슬랩스틱이 아니라 거대한 비극 앞에서도 삶을 지속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민낯이 그대로 묻어나며, 티격태격 다투며 서로의 발을 밟는 모녀의 소동극은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상실의 고통을 억누르며 버텨온 일상의 질감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프로레슬링 액션부터 처절한 모성까지…배우들의 빈틈없는 연기 앙상블

이 기묘하고도 다정한 복수극에 완벽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일등 공신은 단연 배우들의 호연이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친 셋째 딸 '윤동주' 역의 이연은 전직 프로레슬러라는 설정을 위해 10kg을 증량하고 거칠고 역동적인 기술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이식하며 극의 물리적 액션을 온전히 책임진다.
투박하지만 폭발적인 그의 몸짓은 막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응축된 육체적 절규에 가깝다. 법대 출신 둘째 '윤영주' 역의 박소담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붙잡는 냉철한 전략가로 극의 균형추를 잡는다.
첫째 딸 '윤장주'로 분한 공효진은 특유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내고 생활고에 찌든 피로와 날 선 예민함을 거칠게 표현하는데, 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드라마 '유부녀 킬러' 속 캐릭터의 서늘하면서도 절박한 결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며 몰입을 더한다.
여기에 동네 수선집을 운영하며 8년간 칼을 갈아온 엄마 '이옥실' 역의 이정은은 처절한 모성과 서늘한 원한을 교차시키며 감정의 심연으로 관객을 끌고 가고, 가해자로 파격 특별출연한 변요한은 반성 없는 악인의 파렴치한 면모를 확실하게 구현해 내며 극적 긴장감을 완성한다.
사적 제재의 쾌감을 넘어선 질문…사이다를 지운 자리에 남은 묵직한 여운과 흥행의 숙제

후반부에 이르러 마침내 가해자와 마주한 순간, 영화는 어설펐던 유머를 거두고 날카롭고 처절한 복수의 미학으로 전환된다.
가해자를 향해 휘두르는 손끝의 떨림과 무너져 내리는 눈물 속에 남겨진 유족들의 씻기지 않은 고통을 응시하는 연출은 국가와 법이 보듬지 못한 상처를 봉합하려는 눈물겨운 치유와 애도의 의식으로 승화된다.
이 씁쓸하고 현실적인 시각은 '밀양'이나 '친절한 금자씨' 등 기존 웰메이드 한국영화들이 보여준 특유의 묵직하고 서늘한 여운을 고스란히 남긴다.
다만 통쾌한 사이다 결말과 장르적 파괴의 쾌감을 원했던 관객에게는 이 결말이 다소 어렵고, 씁쓸하며, 무겁고 공허하게 다가갈 여지가 크다.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는 충분히 값진 성취지만,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배제한 이러한 서사적 선택은 폭넓은 대중성과 폭발적인 흥행세를 자신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
단 하나의 아쉬움이라면, 전반부 블랙코미디 풍의 로드무비 톤과 후반부 감정적 폭발을 동반한 복수 스릴러 톤 사이의 단차가 다소 급격하다는 점이다.

모녀들이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서 펼쳐지는 몇몇 에피소드들이 다소 파편화되어 늘어지는 탓에, 후반부의 처절한 폭발력에 도달하기까지의 장르적 텐션이 일시적으로 느슨해지는 순간들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경주기행'은 여성을 복수의 무력한 피해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연대와 회복의 주체로 우뚝 세운 사려 깊은 수작이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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