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미국너구리(라쿤)가 눈에 띄는 습성 변화를 보여 학자들이 조사에 착수했다. 공격성 저하가 두드러지는 등 변화의 원인으로 늑대와 같은 자발적 가축화가 꼽혔다.
미국 아칸소대학교 동물행동학 연구팀은 20일 조사 보고서를 내고 미국 전역의 도시에 서식하는 너구리들의 변화가 최근 감지된다고 전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최근 도시 지역의 너구리는 코끝이 짧아지고 얼굴형이 둥글게 변했다. 공격성이 떨어져 사람을 습격하는 경우가 줄었고 민가 정원에 스스럼없이 나타나는 상황이 종종 목격됐다.

연구팀은 너구리들이 가축화 증후군을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인간의 곁에서 사는 동안 야생 너구리가 조금씩 적응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과거 늑대가 개로 변한 것처럼 너구리 또한 인간과 함께 살길을 모색한 결과로 연구팀은 추측했다.
아칸소대 잭슨 스위프트 연구원은 “미국너구리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중형 포유류로 판다와 유사한 얼굴과 줄무늬가 들어간 굵은 꼬리가 특징”이라며 “몸길이는 40~60㎝, 몸무게는 4~9㎏으로 야행성이고 잡식성”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나무 타기나 수영이 특기인 미국너구리는 원래 숲에서 과일이나 곤충, 작은 동물, 물고기 등을 먹었지만 인간의 생활권에 순응해 쓰레기를 뒤지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때문에 미국너구리를 쓰레기 판다(Trash Panda)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미국너구리를 대상으로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의 신체 차이를 자세히 조사했다. 2000년부터 2024년까지 자연 관찰 앱 iNaturalist에 미국 각지의 주민들이 올린 약 2만 장의 너구리 이미지를 분석했다.
이어 컴퓨터를 이용해 너구리의 머리 모양과 코끝 길이를 조사한 결과 도시에 사는 미국너구리의 코끝은 농촌 개체보다 평균 3.56% 짧았다. 얼굴 전체도 약간 둥근 형태로, 인간 입장에서 어딘가 친근한 인상으로 변모했다.
잭슨 연구원은 “코끝이 짧아지는 것은 개나 고양이 등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에 적응한 동물에서 흔한 초기 변화”라며 “가축화 증후군은 야생동물이 사람 곁에 살면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데, 늑대가 개로 변화할 때처럼 공격성이 떨어지고 귀가 처지거나 털 모양이 다양해지고 코끝이 짧아진다”고 언급했다.

연구원은 “도시에서는 야생보다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천적도 적다. 때문에 인간을 더는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너구리일수록 생존하기 쉬워진다”며 “도시라는 환경 자체가 너구리의 체형과 습성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 듯하다”고 말했다.
학계는 이번 연구가 가축화가 인간에 의한 사육이나 번식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진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의미를 준다고 연구팀은 강조했다.
이윤서 기자 lys@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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