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공학자 출신 ‘사과 사냥꾼’…멸종 직전 품종에 새 숨결

한겨레 2024. 9. 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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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톰 브라운
2021년 6월 미국의 한 파머스 마켓에서 톰 브라운이 자신이 재배한 다양한 품종의 사과들을 전시하고 있다. 톰 브라운 제공

사과를 좋아한다. 세상에는 많은 과일이 있다. 사과처럼 익숙한 과일은 또 없다. 어린 시절부터 손님이 오면 꼭 내놓는 과일이 사과였다. 공부를 하고 있으면 어머니가 간식으로 내오는 과일도 사과였다. 너무 익숙하다 보니 귀한 줄을 몰랐다. 내가 소년기를 보낸 1980년대는 지금 인기 있는 과일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 바나나는 어쩌다 한번 먹는 호사였다. 멜론 같은 건 이름만 들어봤다. 복숭아도 좋아했지만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고 나면 입가와 목이 간질간질했다. 참, 요즘 젊은이들은 알레르기가 아니라 알러지라고 말한다. 세월이 흐르면 인기 과일도 바뀌고 용어도 바뀐다.

어린 시절 먹던 사과는 크기가 초등학생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았다. 외할머니는 사과를 사과라고 하지 않았다. 능금이라고 했다. 외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시절 교육받은 사람이라 일본어 단어를 자주 썼다. 마른오징어는 ‘스루메’라고 했다. 이쑤시개는 ‘요지’라고 했다. 나는 능금도 일본어로 사과를 뜻하는 단어라고 추측했다. 아니었다. 능금은 한국의 오래된 토종 사과 이름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먹었던 사과가 능금은 아니었을 것이다. 능금은 사실 사과와 비슷하지만 종이 다른 과일이다. 사과보다 작고 신맛이 강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거의 사장됐다. 능금이라는 단어만 남았다.

홍옥·국광·아오리 사라진 세상

그렇다면 내가 즐겨 먹은 사과는 무엇이었을까? 홍옥이었을 것이다. 그게 홍옥이었는지 어떻게 아냐고? 색깔 덕분이다. 홍옥은 잘 닦으면 반짝반짝 윤이 났다. 요즘 우리가 주로 먹는 부사보다 크기는 작지만 미학적 아름다움은 훨씬 탁월했다. 맛은 부사보다 약간 더 시었다. 시다기보다는 상큼한 맛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가장 인기 있었다는 국광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부사와 생김새가 비슷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초록색 사과였다. 아오리다. 신맛이 조금 강했다. 나는 그 풋풋한 신맛이 좋았다. 초록색 맛이었다.

얼마 전에야 나는 문득 깨달았다. 어린 시절 먹던 사과들이 사라졌다. 홍옥은 사라졌다. 아오리도 볼 수 없다. 국광은 거의 없다. 품을 팔면 살 수야 있다. 인터넷 구입이 가능한 곳도 있다. 재배하는 곳은 이제 몇 없다. 점점 사라질 것이다. 사실상 한국인에게 사과는 딱 한 종만 남은 거나 다름없다. 일본이 육성한 후지, 그러니까 부사다. 부사는 맛있다. 산도는 적고 당도는 높다. 저장과 유통도 쉽다. 다른 사과는 수확하면 금세 물러진다. 부사는 창고에 보관하면 일년 내내 유통할 수 있다. 맛도 적당하고 저장과 유통도 편하니 농부들도 부사만 키우기 시작했다. 부사는 한국 사과 시장을 몇십년 만에 완전히 장악했다.

사실 이건 슬픈 일이다. 소비자가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없다는 건 비극이다. 생물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하나의 종이 시장을 독점하는 건 위험하다. 이를테면 바나나가 그렇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바나나의 99%는 캐번디시종이다. 원래는 향과 당도가 진한 그로 미셸종이 시장을 지배했다. 1960년대 파나마병이 유행하며 그로 미셸은 거의 사라졌다. 대형 과일 기업이 대신 선택한 것이 병에 강한 캐번디시다. 요즘은 새로운 곰팡이가 캐번디시를 공격하고 있다. 멸종이 우려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캐번디시가 사라지면 다른 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단 하나의 종이 시장을 점령하는 건 이렇게 리스크가 큰 일이다.

파머스 마켓에서 본 낯선 사과

2019년 여름 톰 브라운이 과수원에서 울프 리버 품종 사과를 보여주고 있다. 톰 브라운 제공

다행히도 세상에는 멸종해 가는 과일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사과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시장에서 도태된 홍옥을 꿋꿋이 재배하는 한국 농부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미국에는 톰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있다. 지드래곤이 좋아하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톰 브라운이 아니다. 은퇴한 엔지니어 톰 브라운은 미국에서 ‘사과 사냥꾼’으로 알려진 80대 남자다. 멸종 위기에 놓인 희귀한 사과 품종을 찾아내 이를 다시 재배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엇 때문에 죽어가는 사과를 살리기로 결심한 걸까?

톰 브라운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다. 화학공학자로 일하던 그는 1990년대 후반에 은퇴하고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 사건은 1998년 한 파머스 마켓(생산자가 직접 농산물을 소비자나 소매상에게 판매하는 시장)에서 일어났다. 그는 ‘헤리티지 애플’이라고 이름 붙인 가판대에서 예전에는 한번도 보지 못한 사과가 판매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가판대를 운영하던 농부는 200년 전 미국에서 길러졌으나 거의 사라져버린 사과나무를 직접 재배해서 생산한 사과들을 팔고 있었다. 빨간 사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분홍색 사과, 짙은 초록색 사과,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 사과도 있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흔하게 재배되던 품종이었다. 1940년대에 과일 산업이 거대 기업 중심으로 현대적으로 발전하자 맛이 달고 저장과 유통이 쉬운 종이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부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홍옥, 국광, 아오리와 같은 운명을 겪게 된 것이다.

톰 브라운은 파머스 마켓 농부로부터 멸종 직전의 독특한 사과를 사서 먹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어쨌든 은퇴도 했으니 뭔가 좀 흥미진진한 취미를 가져보고 싶던 참이었다. 그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사람들의 식탁에 올랐으나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사과 품종을 다시 발굴하는 일이 꽤 ‘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세상의 많은 발견과 발명과 혁신은 그저 멋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로부터 출발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스티브 잡스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보다는 뭔가 다른 회사보다 더 멋있어 보이는 걸 만들고 싶다는 욕망으로 지금의 애플을 만들었다고 의심한다. 아니, 확신한다.

막상 사과 사냥을 시작하니 화학공학자라는 직업도 도움이 됐다. 사라진 사과를 되살리려면 유전공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과수원도 필요했다. 은퇴 자금으로 그는 자신에게 낯선 사과를 소개했던 과수원 ‘헤리티지 애플'을 인수했다. 모든 준비가 된 톰 브라운은 미국 전역 작은 과수원들을 돌아다니며 희귀한 사과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드문 사과를 봤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내와 함께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수집한 품종을 자신의 과수원에서 재배하며 각각의 품종에 대한 정보를 아카이빙했다. 1999년부터 그가 발견해 되살린 멸종 직전의 사과만 모두 1200종이다. 그의 과수원인 노스캐롤라이나주 클레먼스 ‘헤리티지 애플'에 가면 600종의 사과를 언제나 볼 수 있다. 사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언젠가 미국에 간다면 꼭 톰 브라운의 과수원을 방문해보고 싶다. 뉴욕에서 노스캐롤라이나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이면 된다.

다양한 사회는 입맛의 다양성부터

톰 브라운의 사과 사냥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사과씨를 땅에 뿌린다고 사과나무가 자라는 건 아니다. 접목 등 여러 가지 재배 기술이 필요하다. 1200종의 사과를 한번에 기를 수도 없다. 그는 해마다 품종을 바꿔가며 해마다 각기 다른 60여종의 사과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배해서 판매한다. 과연 이게 계속될 수 있을까? 80대 노인 톰 브라운에게 필요한 건 후계자일 것이다. 요즘은 누구도 손에 흙을 묻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톰 브라운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수익성'이라고 말한다. 멸종 사과를 다시 살려내 판매하는 것으로부터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어야 그의 사과 사냥에도 미래가 있는 것이다.

물론이다. 나는 부사가 당도가 높고 먹기도 간편한 맛있는 사과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홍옥도 그만의 맛이 있다. 아오리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과가 있다. 추석 제사상에 부사만 올리는 건 정말이지 지루한 일이다. 제사상을 찾아온 여러분의 선조도 ‘올해도 부사냐'며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영혼의 형태라 그들의 낙담한 표정을 우리가 볼 수 없을 따름이다. 만약 여러분의 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사밖에 먹어본 적이 없다면? 독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인터넷으로 홍옥, 아오리 등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는 유통되지 않는 사과를 구입하는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아이들은 사과도 다양하게 맛볼 권리가 있다. 다양한 사회는 입맛의 다양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내친김에 포도 이야기도 좀 해보자. 요즘은 어딜 가도 샤인머스켓밖에 없다. 고전적인 포도를 찾으려면 결국 거봉이 대세다. 어린 시절에는 샤인머스켓도 거봉도 없었다. 익히 알려진 캠벨 얼리 품종이 포도의 기본이었다. 요즘은 씨가 없고 껍질째 먹을 수 있는 품종이 인기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어린 시절 두꺼운 껍질을 쪽쪽 빨면 혀가 보라색이 되던, 단단한 씨를 혀로 살살 굴려 뱉어내야 했던 캠벨 얼리종이 그립다. 당도는 조금 낮지만 신맛과 단맛이 어우러진 독특한 향기가 있었다. 초파리가 지나치게 많이 붙는 것이 단점이긴 하다만, 그런 건 마트에서 구입 가능한 초파리 끈끈이 하나면 해결 가능하다. 내일은 아현시장에 포도 사냥을 나가야겠다.

문화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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