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으로 다시 만나자는 이원석 검찰총장을 보내며
대검을 대검답게 만든 이원석 총장
임기 내내 여야 정치권 비판 받아
과거사 피해 회복·수심위 회부 결단도
임기 2년 채운 역대 9번째 검찰총장
13일 퇴임한 이원석(사법연수원 27기) 검찰총장의 업무 스타일을 드러내는 한 일화가 있다.
2022년 12월 서울 강남 스쿨존 사망사고 가해자를 검찰이 구속기소 하기 며칠 전, 이 총장이 대검 간부와 함께 사고가 난 초등학교를 불쑥 찾았다. 한강이 얼어붙고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안팎으로 떨어지던 강추위였다. 이 총장은 몇 시간 동안 사고 현장을 돌며 직접 현장 검증을 하고 학교 관계자도 만나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시절 호흡을 맞췄던 한 수사관이 그를 '빨간펜 선생님'에 비유했던 적도 있다. 심야 조사를 마친 후 보고서를 올리고 퇴근했는데, 다음날 출근해 컴퓨터를 켜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부장님(이 총장)이 새벽에 보낸 회신문에 보고서 속 오타나 잘못된 부분 대한 지적은 물론 향후 수사 방향까지 짚어줄 정도로 세세하게 '첨삭지도'가 돼 있어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 총장이 검찰총장 직무대리를 맡은 2022년 5월 어느 날 일이다.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한 대검 연구관이 퇴근 무렵 전화를 했다. "총장님이 퇴근을 안 했는데 보고 사항이 남아 약속에 1시간 정도 늦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조직에서 가장 높은 총장이 솔선수범하니 간부와 직원들이 알아서 빠릿하게 움직이는 분위기였다. 당시 한 재경지검 간부는 "이제야 대검이 대검다워졌다"고 말했다.
임기가 끝난 이 총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선후배 사이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더라도 그의 성실함과 업무 열정을 리스펙(존경)한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총장으로서는 취임부터 퇴임까지 '원칙'을 강조하며 후배들의 바람막이가 되어줬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중요한 순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바람에 실기했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인 게 임기 막바지 김건희 여사 수사를 두고 벌어진 '패싱' 논란이다. 중앙지검과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와중에도 이 총장은 힘으로 수사팀을 누르거나 감정적으로 입장을 내지 않고 신중했다. "법 앞에 예외도 성역도 특혜도 없다"던 말은 결국 "약속을 못 지켰다"는 대국민 사과로 변했다. 그러면서도 검찰수사심의위원회(수심위)에서 김 여사 불기소를 권고한 뒤 생각을 묻자 "제가 이 사건에 대해 평가를 할 위치에 있지 않다. 외려 국민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위치"라며 수사에 책임을 지는 모습도 보였다.
이태원 참사 사건 당시 수사팀 의견과 달리 수심위를 거쳐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의 기소를 끌어내고, 출장조사 논란 속 김 여사를 수심위에 직권으로 회부한 것은 '원칙에 입각해' 이 총장이 던진 카드가 적중한 것이다. 그는 제주지검장 시절부터 과거사에 많은 관심을 드러냈다. 남북귀환어부 간첩 조작 사건이나 5·18 민주화운동 등 억울하게 국가권력으로 처벌된 피해자의 명예회복에 전임자들에 비해 많은 공을 들인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임기 내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등 야권의 유력 정치인 수사를 진행하며 '친정권'이라는 뭇매를 맞았고, 대검 간부들과 영화 서울의봄을 단체 관람했다가 좌편향이라는 극우 유튜버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 총장은 퇴임사에서 "검찰이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할 만능키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검찰을 악마화하는 사람들, 양측에서 받는 비난과 저주를 묵묵히 견뎠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검찰 독립성 보장을 위해 검찰총장 임기를 2년으로 정한 1988년 이후 24명의 검찰총장이 있었다. 그중 이 총장은 임기를 모두 채운 9번째 검찰총장이다. 퇴임식 전날 기자실에서 이 총장은 "조만간 야인(野人)이 되어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밤늦도록 고민하며 쓰고 고친 A4용지 7장짜리 퇴임사에는 공직자로서의 책임과 의무, 정의, 법치주의에 대한 말들이 빼곡하다. 한국 나이로 50대 중반인 그가 앞으로 언제까지 야인으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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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태헌 기자 siam@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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