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시골언니와 막막한 도시언니가 연결되니…농촌이 달라졌다
[시골언니 프로젝트②] ‘흩어진 시골언니’와 ‘막막한 도시언니’의 연결이 농촌에 가져올 변화들
“시골형은 없나요?” 지난 10월23일 방영된 KBS 다큐ON <나는 시골언니다>를 보고 한 시청자가 남긴 댓글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청년여성 농업농촌탐색교육 프로그램, 이른바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다뤘다. 먼저 지역에 정착한 시골언니들이 귀농·귀촌에 관심이 있는 도시언니들과 일주일 정도 함께 먹고 자며 시간을 보내는 프로젝트다. 시골언니 프로젝트라는 별칭에 걸맞게, 프로그램 지원 대상은 만 19~39세 청년여성이다.
사업을 총괄한 오미란 농식품부 농촌여성정책팀 과장은 “‘청년남성도 지원할 수 있냐’는 문의가 많았지만, 기존 귀농·귀촌 프로그램들은 농촌 청년여성들이 겪는 특수성을 반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이들의 고충을 해결하려면 청년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시골언니들이 겪는 특수한 어려움은 무엇이고, 청년여성만을 대상으로 정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 과장과 시골언니 프로그램에 참여한 세 시골언니 이수진(35), 박누리(37), 이유미(39)씨를 만나 그 답을 들었다. 인터뷰는 10월25일 충북 옥천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서 이뤄졌다.
도시언니들의 ‘비빌 언덕’ 자처한 시골언니들
농촌 정착의 첫 단계는 마을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농촌은 도시와 달리 생산의 공간과 삶의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다. 정보가 많고 서비스도 외주화되어 있는 도시와 달리 농촌에선 급할 때 농기계를 빌리거나 일손을 보탤 이웃이 필수다.
연고 없이 농촌에 정착하려는 여성들의 어려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친족 관계를 중심으로 오랜 시간 이어져온 공동체는 그 자체로 ‘관행적 권력’이 되기 쉽다. 귀농·귀촌인을 외지인으로 보는 시각,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경제주체로 보지 않는 가부장적 문화도 청년여성들의 네트워크 진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중장년 남성을 중심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농촌 마을에서 ‘청년’ ‘여성’은 이중의 소수자성을 가진 존재다. 오 과장은 “농촌의 인식과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청년여성들은 일반적인 귀농·귀촌 정책에서조차 소외되기 쉽다”고 말했다.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귀농을 결정한 청년들에게 창업 지원금이나 농기계를 지원하는 기존 정책과 달리 ‘귀농 전 단계’에 초점을 맞췄다. 시골언니들의 만남을 통해,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청년여성들은 정착 이후 겪게 될 어려움을 ‘선인식’하게 된다. 먼저 지역에 내려온 시골언니들은 어떻게 정착했는지, 농촌은 살 만한 곳인지 충분히 알아본 뒤 귀농을 결정해야 ‘역귀농’을 피할 수 있다.
충남 서천에서 허브 농사를 짓고 있는 이수진씨는 “시골 생활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생태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내려왔지만, 농사는 언제 일하고 쉴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그는 “농업이 상당한 투자금이 있어야 하는 사업이라는 것을 내려와서야 알았다. 목돈이 없다 보니 살 집을 구하지 못해 이사도 정말 많이 다녔다”고 했다.
2018년 충남여성정책개발원이 작성한 ‘청년여성농업인 육성 및 정착활성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 기반이 없는 비혼 청년여성은 주거지 마련, 농지 구입,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등 자립 과정 자체가 고군분투”다. 이씨는 자립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서천에서 만난 수많은 ‘시골언니들’을 꼽았다. 그는 “1박2일 귀농교육 때 만난 한 멘토 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처음 서천에 내려와 집 없고 밥 먹기 힘들던 1년 동안 일주일에 5일 저녁밥을 먹여주셨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비볐으면 나도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이 농촌 정서다. 시골언니들이 이번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북 순창에서 부녀회장을 맡고 있는 이유미씨(39)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처음 순창에 왔을 때 언니들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이 은혜를 어떻게 갚냐’고 했더니 ‘나중에 나 같은 동생들을 도와주면 된다’고 하셨다. 순창에 정착하려는 여자 동생들에게 집이나 농지를 소개해주며 같은 말을 해준다”고 말했다.
농촌을 변화시키는 언니들의 연대
농식품부에 따르면 ‘청년’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은 있었지만, ‘청년여성’을 구체적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은 시골언니 프로젝트가 사실상 처음이다. 농식품부는 예산이 확정된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청년들을 만나 의견을 청취했다. 충북 옥천에 사는 박누리씨도 그중 하나였다.
“저희 지역에서도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이나 ‘귀농·귀촌 캠프’를 자주 진행하거든요. 농사·농업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2030은 정말 소수예요. 그마저도 마이크를 쥔 사람들은 대부분 중장년 남성이죠. 제가 행사에 참가한 저 여성이라면 그 시간들이 썩 유쾌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농식품부가 청년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이 컸죠.”
경북 구미 출신인 박씨는 12년 전 옥천신문 신입 기자로 처음 옥천 땅을 밟았다. 지금은 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에서 옥천 소식을 전하는 잡지 ‘월간옥이네’를 만든다. 그는 “시골언니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여성들이 농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고 말한다.
“삶의 터전으로 삼기엔 너무 불편하고 가부장적인 공간일 것이라는 편견이 있잖아요. 물론 ‘결혼은 안 하냐’ 같은 답답한 질문들은 여전하지만, 지역에서 변화를 일구어가는 여성이 많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옥천 시골언니 프로그램의 캐치프레이즈는 ‘여성로컬미디어주간’이다. 오랜 기간 지역공동체에 기여해왔음에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마이크를 돌려주는 것이 목표다. 박씨는 도시언니들과의 만남이 시골언니들에게 미치는 긍정적 영향에 주목한다.
“처음 부녀회 시골언니들에게 섭외 요청을 하러 갔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나한테 무슨 이야깃거리가 있다고’였어요. 하지만 도시언니들에겐 이분들 한마디 한마디가 귀중한 조언이잖아요.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자존감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외부에서 ‘당신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껴요.”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도시언니와 시골언니를 연결하는 사업이지만, 농촌 여성들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수진씨는 시골언니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크리에이터, 목공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서천 언니들과 새롭게 ‘연결’됐다.
“지역에 청년모임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여성만 10명 가까이 모이다 보니 이것 자체가 또 다른 커뮤니티가 되더라고요. 각자의 유통 채널을 하나로 통합한 ‘청년 생산자 모임’부터 잡초를 이기지 못할 바엔 먹거리로 만들어 팔아보자는 ‘잡초 연구 모임’까지, 크고 작은 소모임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어요.”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이 한데 모이고, 이들이 주체가 된 그룹이 형성되는 순간, 가부장적인 농촌에도 변화의 가능성이 싹튼다. 이유미씨는 “남편이 청년회에 가입하면 아내가 자동으로 부녀회에 들어가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부녀회는 청년회에 딸려 밥하고 보조하는 역할로밖에 안 보는 것”이라며 “최근 다른 언니들과 함께 문제를 제기해 이를 개정했다”고 말했다.
남은 과제도 많다. 이수진씨가 사는 마을에는 2019년부터 부녀회가 없어졌다. 마을에 활동 가능한 여성 인구가 단 3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는 읍으로 나가야만 다른 여성 농업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있다”고 했다. 젊은 여성 한 명을 정착시키는 것은 소멸위기 지역엔 사활을 건 과제다. 농촌의 성인지 감수성 개선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농촌 여성 정책 컨트롤타워가 필요한 이유
‘왜 여성만 지원하느냐.’ 이러한 질문은 여성 농민 운동이 본격화됐을 때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할아버지들은 방에서 회의를 하고, 할머니들은 밖에서 음식 준비를 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 농민들은 ‘여성이 주체가 된 조직’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1989년 여성농민회 설립은 그렇게 얻어낸 성과였다.
2019년 농촌여성정책팀 신설 뒤에도 ‘농식품부 내 여성농민 전담부서가 필요하다’는 여성농민단체들의 오랜 요구가 있었다. 30년간 여성 농민이자 민간 농촌 정책 연구자로 활동해온 오 과장이 초대 팀장을 맡았다. 오 과장은 “이 부서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지 알기에 부담감이 컸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추진한 신규 사업만 여러 개다. 여성 농업인 특수건강검진, 청년여성 농업·농촌 탐색 교육 프로그램, 영농여건 개선교육사업, 농촌형 성평등전문강사 양성, 성평등 지표 개발 및 보급 등. 사업 범위 또한 보건, 교육, 보육 등 사회 전 분야를 아우를 정도로 광범위하다.
“농촌은 남성이 주로 하는 벼농사와 여성이 주로 하는 밭농사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여성 농민들은 밭에 쪼그려 앉아 장시간 반복 노동을 하고, 동시에 가사와 육아까지 전담하죠. 일반적인 농촌 정책이 남성들이 쓰는 농기계나 기술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여성 농민의 삶을 바꾸는 정책은 돌봄부터 생산까지 종합적으로 봐야 해요.”
오 과장은 “여성을 배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배제해도 큰 불편이 없기 때문에 차별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농촌여성이 자신의 경험과 요구를 나눌 수 있는 전담 부서, 즉 ‘컨트롤타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먼 미래에는 여성 관련 부처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어요. 모든 부서, 모든 정책에 성인지적 관점이 반영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전까지는 여성들 삶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피는 별도의 전담 조직이 반드시 필요해요.”
12월3일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오픈라운지에서 열리는 성과공유회 ‘시골언니, 서울체크인’을 끝으로,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6개월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이날 행사에서는 8개 지역 시골언니와 도시언니들이 한자리에 모여 참가 후기와 성과, 개선점 등을 나눌 예정이다. 농식품부는 “이날 나온 의견을 바탕으로 내년도 사업 대상 지역과 범위를 더욱 확대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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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언니 프로젝트①] 먼저 정착한 ‘시골 언니’들의 현실 조언… “시골살이는 사람이 전부야!”
[시골언니 프로젝트②] 흩어진 시골언니의 막막한 도시언니가 연결되니… 농촌이 달라졌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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