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간 정부 일회용품 규제…멀어진 ‘플라스틱 제로’ 제주
일회용컵 보증금제 철회에 동력 잃어
“어르신들께 ‘재사용’ 컵에 대해 설명해드릴 때 잘 못 알아들으시면 ‘제주도에 있는 스타벅스랑 같은 컵이라서 거기서도 반납 가능해요’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불만을 누그러뜨리셨는데 이제는….”
지난 7월16일 찾은 제주도 우도에 있는 박성준(31)씨의 카페에서 음료를 테이크아웃 하려면 1천원의 보증금을 추가해 다회용컵에 음료를 받아야 했다. 매장 안이나 우도 항구에 설치되어 있는 다회용컵 회수 기기에 컵을 반납하면 1천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 반납한 컵은 회수·세척 업체를 거쳐 다시 카페로 돌아온다. 일회용품이 아닌 다회용품을 쓰는 것은 플라스틱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기 위해 가공을 거쳐야 하는 일회용품과 달리, 한번 만들어진 제품을 같은 용도로 ‘재사용’하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2021년 환경부·한국공항공사·스타벅스·에스케이(SK)텔레콤 등과 협약을 맺고 도내 스타벅스 매장 등에서 ‘다회용컵 보증금제’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정부는 일회용컵에 보증금(300원)을 매기는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2022년 12월 제주·세종에서 우선 시행했는데, 제주도는 자체적으로 민간과의 협약을 통해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제도를 먼저 시도한 것이다. 2022년 8월부터는 사업을 우도에까지 확장해, 올해 9월 현재 우도 내 카페 19곳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직접 소비하는 플라스틱은 대부분 ‘일회용’으로, 그중 단 9%만이 재활용될 뿐 대부분 매립·소각되면서 어마어마한 탄소를 배출한다. 그린피스의 ‘2023 플라스틱 대한민국 2.0’ 보고서를 보면, 2020년 기준 1인당 연간 일회용 플라스틱 소비 발자국은 19㎏이었는데, 생수 페트병 109개(1.6㎏), 일회용 플라스틱컵 102개(1.4㎏), 일회용 비닐봉투 533개(10.7㎏), 일회용 플라스틱 배달용기 568개(5.3㎏) 등이다. 생활계 플라스틱 폐기물 전체(441만톤)의 20%에 해당한다.
인구는 70만명이지만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한해 1천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제주도는 플라스틱이 포함된 생활계 폐기물 발생량이 전국 평균보다 2배가량 많다. 제주도가 ‘청정 제주’를 앞세우며 정부가 추진하는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넘어 민간이 주도하는 다회용컵 보증금제까지 적극적으로 시행했던 이유다.
다회용컵 보증금제의 최대 걸림돌은 컵을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는 등 소비자들의 ‘불편’이다. 정부가 일회용컵 보증금제 의무화를 추진할 때에는 이런 불편을 무마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보증금을 냈다가 돌려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비용에서 큰 차이가 없는데다 환경친화적이라는 명분까지 있는 다회용컵을 쓰는 게 차라리 더 낫기 때문이다.
박씨 역시 “정부의 정책이다”, “대형 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도 한다” 등을 앞세워 소비자들을 설득했다. 시범사업 결과 2021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800만여개의 일회용컵 사용을 줄였고, 올해 컵 회수율은 83%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환경부가 전국 의무화를 앞두고 있던 일회용컵 보증금제를 사실상 철회해버리면서, 힘겹게 만들어온 동력도 함께 사라졌다. 다회용컵 보증금제 사업의 실무를 맡았던 에스케이 출연 사회적기업 ‘행복커넥트’는 올해 5월 “운영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행복커넥트 관계자는 “일회용컵 보증금제에 대한 정부의 정책 드라이브가 떨어지면서 우리도 고객들에게 다회용컵을 쓰라고 하기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고 한겨레에 밝혔다. 정부의 홍보 효과가 사라지며 컵 보증금제가 필수에서 선택이 되어버린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2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환경부로부터 제출받은 ‘일회용컵 보증금제 선도지역 모니터링 연구용역’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10월 제주에서 일회용컵 보증금 제도를 실시하는 매장이 전체 참여 매장 446곳 가운데 422곳(이행률 94.6%)에 이르렀고, 반환율도 78.3%에 달했으나 전국 의무화 철회 뒤 지속적으로 떨어져 올해 8월엔 전체 504곳 가운데 226곳(이행률 44.8%)만이 제도를 실시하고, 반환율도 54.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 본섬과 달리 우도에서는 다행히 행복커넥트의 뒤를 이어 ‘더그리트’라는 업체가 다회용컵 보증금제 사업을 시행하는 중이다. 이전엔 컵 세척을 제주 본섬에서 했어야 했지만, 지금은 제주도청이 우도 안에 소유하고 있는 세척장을 활용해 제작·공급·회수·세척 등 전 과정이 우도 안에서 이뤄진다.
방인환 더그리트 제주 총괄은 “일회용컵 한개의 납품가가 100~150원인데, 다회용컵의 경우 사용료·세척료 포함해 150원 정도로 사실 비용 측면에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제주도의 지원 정책으로 컵 한개당 100원 정도의 비용을 지원받고 있기도 하다”고 밝혔다.
그보다 관건은 더 많은 업체가 참여해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느냐에 달렸는데, 방 총괄은 무엇보다 “정부의 강력하고 일관된 정책”이 아쉽다고 짚었다. 정부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소비자들의 불편·편견을 줄이고 재사용을 정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도에서 또 다른 카페를 운영하는 박아무개(34)씨는 “일회용컵을 사용할 땐 하루에 8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3개를 매일같이 버렸는데 (다회용컵 사용으로) 그 양이 다 줄어들었다”며 “우도에서 잘 정착돼 전국적으로도 확장되길 바랐는데, 정책의 후퇴로 허탈해진 것이 사실”이라 말했다.
제주도에서 다회용컵 보증금제가 후퇴한 사례를 보며, 전문가들은 정부가 일회용품에 대한 ‘규제’ 정책을 더욱 확고하게 펴야 한다고 주문한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결국 환경을 위해서는 다회용컵 보증금제로 가야 하는데, 일회용컵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다회용컵을 사용하는 사업 모델이 정착할 수 없다”고 짚었다.
국내 최초의 ‘리필스테이션’(재사용) 상점인 ‘알맹상점’의 고금숙 대표는 “이젠 몇만명이 오는 잠실야구장에서도 일회용기가 아닌 재사용 용기를 쓰는 등 우리 사회와 기업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고 본다. 문제는 정부의 확실한 규제가 없기 때문에 다회용품이 소비자 불편이라는 불리함을 안은 채 시장에서 일회용품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재사용 정착을 목표로 제도를 만들고, 일회용품 규제와 다회용품 사용 지원을 병행해야만 플라스틱 소비를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제주/글·사진 정봉비 기자, 윤연정 기자 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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