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보다 우리가 먼저 [산을 오르는 아이들]
13 경주 남산 삼릉 금오봉 코스
숨 가쁜 일상을 보내고 마침내 찾아온 토요일 아침이다. 하얗고 마른 햇살이 차가운 공기 중에 가늘게 퍼지고 있었다. 느리게 몸을 일으켜 세우다 시계를 보고 멈칫했다. 약속시간까지 바듯할 것 같았다. 서둘러야 했다. 급하게 아이 둘을 챙겨서 차에 태우고 삼릉으로 달렸다. 잠에서 덜 깬 무거운 몸 때문인지 계속해서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우린 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린이집을 함께 다니던 아이들이 졸업을 하고, 각자 다른 초등학교로 가게 된 이후 이렇게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이다. 다들 얼마나 컸을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린이집 흙 동산에서 온몸으로 뒹굴고, 흙 파고 놀던 아이들이 말쑥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일곱 살 때 그대로인데 팔 다리만 더 길어져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개구쟁이 눈빛이 여전하다. 어느덧 열 살이 된 세 명의 남자아이들과 아홉 살, 일곱 살이 된 우리 집 아이들은 서로 어색해할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산길을 올랐다. 시작 소리도 못 들었는데, 누가 먼저 오르는지 서로 겨루고 있었다.
벌써 저만치 앞서 오르는 아이들 뒤로 엄마들과 그간 근황을 나누었다. 초등학생이 되자 각자의 일상이 더 바빠져서 여러모로 서로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이 아이들은 어린이집 시절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같이 산을 누비고 다니며 놀던 친구들이다.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몸에 배어 있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몸이 자연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실제로 우리 집 아이는 학교생활 중에 몸이 근질거리는지 산타령을 꽤나 했었다. 축구나 태권도 놀이터 같은 걸로 해소 안되는 다른 무언가가 있나 보다. 이 아이들, 산길을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걷는 모양새가 여전하다.
그저 자연 속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감각을 알고 있나 보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이나 핸드폰 영상과 노래가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을 지우기는 어렵다. 오늘은 금오봉까지 도전이다!
겨울 산은 생명의 비밀을 껴안고 긍엄하게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다. 마른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왔다. 올라갈수록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불어왔다. 얼굴을 밀어내고, 다리를 얼게 만들었고, 코가 시리고 아파 왔다. 대화는 잦아들었다. 삼릉 계곡의 물은 말라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던, 몇 번이고 왔었던 그 길이 맞나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들었다. 낙엽 길이 되어버려서 미끄러질 뻔했다. 가지를 훤히 드러낸 나무의 민낯을 보며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동안 가열되어 있던 머리가 식어갔다.
성산암까지 오면 거의 다 온 것이다. 바람을 타고 간 모양인지, 앞서 간 아이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저학년 아이들이지만 학교에는 핸드폰이 없는 아이들을 찾기가 어렵다. 학원이나 아파트 단지 내에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모습도 흔한 일이다.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만났다. 자연의 주파수에 맞추어 몸의 감각에만 집중한다. 호흡만 남아 있다.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점심에 뭘 먹을까 의논을 하며, 다른 친구의 의견을 조율하며 걸었다. 그저 자연에서 같이 있었다는 그것만으로도 몸이 기억하고 있던 익숙한 공기가 우릴 타임 슬립해서 자유롭게 놀던 어린이집 그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실은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노예가 된 현상은 어린아이들만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인터넷이 아닌 자연에 접속되는 순간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아이들을 탓하기 전에 어른인 우리가 이런 만남의 시간을 지켜주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겨울 산이 어떻게 봄 산으로 변하는지, 그 계절의 미세한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그 시간 속에서 자연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이 고리를 놓치고 싶지 않다. 무거운 몸과 무기력한 감정을 뚫고 만나게 될 내 안의 생명력을 믿고 싶다.
금오봉까지는 이제 금세 오르는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거센 바람을 뚫고 또 한 번 내리막길을 향하는 아이들을 보며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을 했다. 두 볼이 발갛게 된 아이는 겨울 산은 땀이 안 나서 시원하고 좋다고 말했다. 점심만 먹고 헤어지는 게 아쉬운 친구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만 만나서 산에 가는 건 너무 적지 않냐는 친구도 있었다. 또 같이 만나 놀고 싶다는 친구도, 형들이 가는 곳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 문화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스마트폰을 잠시 접어 두고 아이들과 산을 오르는 일을 계속해야만 하겠다. 산 기운 듬뿍 채우고 생기 넘치는 얼굴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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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경
생태적인 삶과 자연농 농부로 사는 게 꿈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답게 사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여덟 살 여자아이, 여섯 살 남자아이,
남편과 시골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yoon.vertclair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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