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성목 칼럼니스트]
혁명은 사람들이 완전히 극빈 상태에 빠지고 온갖 수단으로 억압당하며 희망을 상실한 때가 아니라, 성장과 개선 그리고 기대감이 있지만 고루하고 엄격한 기존 질서에 의해서 방해받을 때 발생되는 법이다.-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Nicholas V. Riasanovsky) & 마크 D. 스타인버그(Mark D. Steinberg)
바뀌지 않는 건 없다. 어떤 나라든 옛것을 고치거나 없애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교체’가 늘 자연스레 이뤄지는 건 아니다. 변화에 저항하는 기득권 계층은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 이들은 한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기에 권력을 잃기 싫어 발버둥을 친다. 힘으로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건 물론이고 법을 짓밟는 ‘실력행사’까지 벌이기도 한다.
왕이라도 개혁을 외쳐 기득권 눈 밖에 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랴자놉스키와 스타인버그가 말하듯, 시대가 바뀌며 찾아오는 변화를 언제까지고 막을 순 없다. 오스만 제국에 거센 도전이 잇따른 19세기, 그 첫 장을 연 마흐무트 2세(Mahmud II)의 예니체리(janissary) 청산은 대표적인 경우다.

군주와 함께 전장을 누빈 그들 : 변질되다
오스만 제국을 만든 건 전사(gazi)들이다. 술탄의 입장에선 전사들과 다툼이 생기면 자신이 배신을 당할 위험이 너무 컸다. 그 고민을 덜어준 게 '예니체리(근위대)'의 창설이다. 14세기 무라트 1세(Murad I)는 술탄이 직접 이끄는 예니체리를 만들어 평소엔 자신을 호위하게 했고, 전투에선 앞장 서는 특공대 역할을 그들에 부여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 술탄들이 스스로를 ‘말 위의 군주’라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니체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지역(특히 발칸)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이 대상이었다. 이들을 이슬람을 믿도록 개종한 뒤 국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르쳤다. 뒤이어 화약, 무기 사용법 습득 등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준비가 되면 술탄과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며 적과 싸웠다. 메흐메트 2세(Mehmed II)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비잔티움 제국 멸망, 셀림 1세(Selim I)의 맘루크 술탄국 제압, 슐레이만 1세(Suleiman the Magnificent)가 이끈 최고 전성기. 오스만 제국이 누린 영광의 무대에 예니체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여기서 잠깐. 예니체리는 로마나 비잔티움 제국의 근위대와 유사했다. 자연스레 오스만 제국 술탄 또한 예니체리에게 위협받을 우려가 컸다. 이미 술탄들이 ‘말 위에서 싸우는 전사’일 때도 충성을 받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술탄이 즉위할 때마다 봉급 인상과 보너스를 요구했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게 급한 술탄들이 예니체리에게 돈을 주며 무마하는 일이 이어졌다.
셀림 2세가 술탄이 전장을 누비는 전통을 깨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여기에다 술탄에 오를 수 있는 잠재적 계승자들이 모두 유폐되어 있다가 갑자기 제위를 물려받는 시스템이 더해졌다. 따라서 파디샤(Padishah, 오스만 제국의 군주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가 예니체리를 제압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르는데 궁전과 가장 가까이 있는 군대에 어떻게 함부로 손을 대겠는가.

오스만 제국 18세기의 주역 : 문제는 국정농단
이제 예니체리는 전사가 아니었다. 그저 이권 집단이었을 뿐.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다. 예니체리들을 나쁜 일만 벌인 집단으로 그리는 서술은 과거에 비해 줄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슐레이만 1세 사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만을 거듭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흐름과도 닿아있다.
예니체리가 엘리트 집단과 민중 사이에서 도시 생산 계층을 대표했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영미권의 대표적 오스만 제국사 연구자였던 도널드 쿼터트(Donald Quataert)는 《오스만 제국사 : 1700 – 1922》에서 예니체리가 수공업자들에게 돈을 받고 사업들을 보호했고 엘리트의 전횡에 대한 방어벽이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중적 민병대였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18세기 오스만 제국 내 다양한 집단 가운데 하나로 예니체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계층과 민족이 스펙트럼을 이룬 오스만 제국에 예니체리는 정치·사회적 매개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제국은 예니체리의 거듭된 봉급 인상과 보너스 요구에 몸살을 앓았다. 심지어 온 나라가 그들의 인건비(?) 때문에 인플레이션까지 겪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정복한 영토에 있던 기독교도 가정의 자녀들을 예니체리로 만드는 옛 전통은 이미 깨진 상태에서(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이 새로 정복한 영토가 거의 없다는 걸 떠올리면 당연한 일이다) 예니체리는 세습을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이어갔다. 군사적 기능을 상실한 집단이 국고를 축내며 힘을 놓지 않은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제국을 둘러싼 상황도 심상치 않았다. 서구화 정책으로 힘을 키운 러시아 제국은 흑해와 캅카스(코카서스), 나아가 발칸까지 넘보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 유럽에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졌다는 점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만 제국을 세차게 흔들었다.
오스만 제국에 쇄신은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 여러 집단이 권력을 나눠 갖는 체제에서 벗어나 술탄이 개혁의 열쇠를 쥐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예니체리들은 줄곧 반발했다. 심지어 예니체리 폐지를 시도한 셀림 3세(Selim III)를 끌어내린 뒤 죽이기까지 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손대선 안 된다고 협박한 것이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두 모르고 있었다. 개혁을 꿈꾸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마흐무드 2세의 와신상담 : 운명의 1826년
어머니가 그의 존재를 감추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마흐무트 2세. 1808년 우여곡절 끝에 술탄이 되었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흐무트 2세는 일단 ‘생존’이 먼저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개혁을 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예니체리에게 계속 일깨우는 데 집중한다. 셀림 3세처럼 공개적으로 예니체리를 해체하겠단 말을 꺼내지 않은 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는 굴욕을 참으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흐무트 2세는 먼저 여러 '울라마'(Ulama:이슬람 신학의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울라마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해석을 내려 술탄을 도울 수 있었기에 예니체리 청산의 명분은 당연히 그들로부터 얻어야 했다. 더불어 예니체리 모르게 술탄을 보좌할 부대를 조금씩 새로 만든다. 포병, 공병 등 화력이나 공성 중심의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군대가 창설 대상이었다. 그리스에서 벌어진 전쟁과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of Egypt)가 떠오른 건 술탄이 새로운 군대를 갖는 일에 좋은 명분이 됐다. 이는 여론의 형성에도 긍정적이었다.
준비한 시간은 무려 18년. 기회가 왔다. 1826년 5월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스탄불에 주둔한 51개 예니체리 부대들에서 각각 150명씩 뽑아 별도의 군대를 만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들은 한 병영에 머물며 유럽의 머스킷(총기의 일종) 사용법과 군사 전술을 배울 예정이었다. 군대라면 당연히 해야 될 일을 어떻게 개혁이라 말할 수 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접근한 시도였다.
하지만 예니체리는 반발했다. 이미 있는 예니체리 부대에서 따로 뽑는 건 자신들의 특권을 뺏는 일이라 여긴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14일 밤 이스탄불에서 예니체리가 들고 일어났다. 예전처럼 무력시위를 벌이면 술탄을 제압하리라 보았다. 하지만 마흐무트 2세는 단호했다. 곧바로 은밀히 키운 군사들(특히 포병대)을 소집했다. 반란을 목격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들이 모인 광장에 포격을 지시한다. 초강수였다.
예니체리들은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마흐무트 2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예니체리 개혁을 지지한 울라마, 학교인 메드레세의 학생들, 거기다 민중들이 거리 곳곳에서 예니체리와 싸웠다. 반란은 동력을 잃었고 하루가 지난 15일, 완전히 제압되었다. 이스탄불에 이어 이즈미르, 에디르네 등에서 산발적 봉기가 있었으나 대세는 이미 정해진 뒤였다.
수많은 예니체리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은 예니체리들 또한 제국 곳곳에서 체포, 처형됐다.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약 6,000명 정도란 기록도 있지만 유럽의 그것에 따르면 많게는 2만 5,000명에서 3만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 초기부터 오랜 시간 권력을 휘두른 예니체리는 마흐무트 2세의 철저한 준비와 의지 끝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후의 개혁 : 마침내 시작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 연구가 활기를 띠자 프랑스에서 《오스만 제국 사전(Dictionnaire de L’empire Ottoman)》이 나왔다. 여기엔 많은 표제어가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고 당연히 예니체리 또한 사전에 실렸다. 그런데 예니체리 청산은 정작 예니체리 항목에 등장하지 않는다. 바로 별도의 표제어, 예니체리 폐지(Janissaires, suppression des)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표제어를 따로 뗄 정도로 '예니체리 청산'이 오스만 제국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오래 이어진 병폐가 청산되지 않은 채 마지막을 맞은 나라가 매우 많다. 바깥의 힘에 기대지 않고 제도나 통치자의 의지로 이를 바로 잡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1826년 당시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을 시도하기에 젊은 나이도 아니었다(1785년 생으로 당시 41세). 그럼에도 그는 앞선 술탄들의 좌절에서 교훈을 얻어 예니체리를 제압해 근대화를 위한 마지막 기회를 여는 일에 성공했다.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유럽이 오스만 제국에 아직 나라를 지킬 힘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예니체리는 해체됐지만 오스만 제국이 걸어간 역사가 순탄했던 건 아니었다. 제국은 발칸의 영토를 거의 잃었고 영국이나 프랑스에 의지하지 않고선 러시아 제국을 막는 일조차 힘들었다. 군의 체질 개선은 독일 제국에 의지했다.
그럼에도 역사가들은 말한다. 예니체리 청산이 없었다면 오스만 제국 근대화는 시작할 수 없었다고. 수백 년에 걸친 예니체리를 없앤 것만큼 오스만 제국의 의지를 널리 알린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하여 탄지마트(Tanzimat: 터키의 신문학 운동)가 이어졌고 제국의 생명은 20세기까지 연장됐다. 《오스만 제국 사전》이 말하는 것처럼.
※ 필자인 추성목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스스로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졸업 후 취업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에 입학해 ‘제2의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비시 체제와 레지스탕스, 쇼아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목표. 또 중국과 중앙유라시아, 중동 등 지역을 다룬 프랑스어권의 저서나 자료들을 번역해 소개하겠다는 목표. 이 둘을 마음에 지니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