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인도오픈을 보면, 겉으로는 “안세영에게 길이 열렸다”는 말이 쉽게 나온다. 야마구치 아카네가 빠지고, 가오팡제가 기권하고, 안세영이 비교적 매끄럽게 라운드를 통과하니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건 자연스럽다. 그런데 대진표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중국 선수들의 움직임을 차근히 뜯어보면, 이번 대회가 단순히 ‘꿀대진’ 같은 단어로 정리될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안세영이 결승까지 간다고 가정했을 때, 마지막에 마주칠 가능성이 큰 상대들이 어떤 상태로 올라오는지, 어떤 방식으로 승리를 쌓아가는지에 따라 결승전의 색깔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그 힌트가 바로 천위페이, 한웨, 왕즈이의 초반 경기들에 꽤 선명하게 드러났다.

먼저 천위페이는 대만의 린샹티(21위)를 상대로 2-0(21-17, 21-17) 승리를 가져갔다. 스코어만 보면 무난한 승리지만, 경기 흐름을 보면 초반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1세트 초반 1-5까지 밀리며 상대 기세를 한 번 받아줘야 했고, 이후 동점을 만들며 숨을 돌린 뒤에야 특유의 운영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천위페이가 강한 이유는 한두 번 흔들려도 당황하지 않는 데 있다. 크게 흔들리지 않게 점수를 ‘정리’하는 능력이 있고, 상대가 힘을 쓴 구간이 지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득점 루트를 단순하게 만든다. 결국 21-17이라는 점수는 “딱 필요한 만큼만 더 앞서가며 끝냈다”는 의미에 가깝다. 특히 말레이시아오픈에서 부상 이슈로 기권했던 뒤라, 이번 1회전은 ‘몸 상태 점검’ 성격도 있었을 텐데, 큰 무리 없이 2세트를 같은 점수로 정리했다는 것 자체가 천위페이가 ‘대회 모드’로 들어왔다는 신호다.
반면 한웨는 훨씬 더 거친 길을 걸었다. 32강에서 대만의 쑹숴윈(31위)과 1시간 3분을 싸워 2-1(18-21, 21-13, 21-17)로 역전승을 거뒀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세계 5위가 아래 랭커에게 고전했다”가 아니다. 고전의 내용이 어떤 종류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한웨는 1세트에서 한 번 역전(15-13)까지 만들었는데, 그 흐름을 지키지 못하고 18-18에서 무너졌다. 이건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경기의 리듬을 잡는 과정에서 집중이 끊긴 흔적에 가깝다. 쉽게 말해, 한웨는 ‘기세 싸움’에서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도 2세트에서 바로 21-13으로 판을 뒤집은 건, 적어도 경기 중 수정 능력은 확실하다는 뜻이다. 3세트 역시 한 번 6-10으로 밀리며 분위기가 넘어가는 듯했지만, 11-14에서 6연속 득점으로 뒤집어버렸다. 이 장면은 한웨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흔들릴 수는 있어도, 점수를 ‘몰아치며’ 뒤집는 힘이 있다. 다만 이런 방식의 승리는 체력을 많이 쓴다. 63분 혈투는 기록으로 남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다음 경기에서 다리와 어깨가 무거워지는 시간일 수도 있다. 결승까지 생각하면, 이런 장시간 경기 한 번이 누적 피로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왕즈이 이야기는 더 복잡하다. 왕즈이는 32강에서 인도의 탄비 샤르마(41위)에게 69분 혈투 끝에 2-1로 간신히 이겼다는 소식이 먼저 나왔다. 이런 경기는 흔히 “컨디션이 안 좋다”로 단정하기 쉬운데, 바로 다음 라운드에서 왕즈이가 보여준 반응을 보면 단순 컨디션 문제로만 보긴 어렵다. 16강에서 베트남의 응우옌 투이린(23위)을 상대로 2-0(21-12, 21-17)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올라섰고, 심지어 1세트는 꽤 편하게 가져갔다. 다만 2세트에서는 9-15까지 밀리기도 했다가 10-16에서 8점을 연달아 몰아치며 뒤집었다. 이게 왕즈이의 ‘무서운 점’이다. 경기가 꼬여도, 단 한 번의 연속 득점 구간으로 결과를 뒤집는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불안한 점’이기도 하다. 애초에 9-15까지 밀렸다는 사실 자체가, 경기 운영이 매끈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강자에게는 이런 흔들림이 치명적일 수 있다. 안세영을 상대로 왕즈이가 계속 막히는 이유도, 결국 중요한 순간에 경기의 주도권이 미끄러지는 장면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오픈 결승에서 2세트 17-8 리드를 놓친 장면은 그 대표 사례로 남아 있다. 이게 단순한 실수 한두 번이 아니라, “앞서갈 때 경기를 끝내는 방식”에서 안세영과 차이가 난다는 신호다.
여기서 인도오픈 대진의 진짜 재미가 생긴다. 천위페이, 한웨, 왕즈이는 모두 같은 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즉, 누군가는 결승에 오르기도 전에 무조건 떨어진다. 기사들에서 ‘중국 빅3가 한쪽에 몰렸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팬 입장에서 보면 잔인할 정도로 빡빡한 구조다. 누가 올라와도 상처가 남을 가능성이 크다. 왕즈이는 32강에서 이미 69분을 태웠고, 한웨는 63분을 썼다. 천위페이는 상대적으로 시간을 아꼈지만, 강한 상대들이 줄줄이 기다린다. 결국 “안세영을 만나러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다만 그 험난함이 안세영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된다. 결승에서 만나는 상대가 누가 되든, 그 상대는 대진에서 체력과 심리의 소모를 이미 한 번 이상 겪고 올라올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안세영 우승 확정” 같은 말로 달려가면 위험하다. 토너먼트는 늘 변수가 생긴다. 다만 지금까지 흐름만 놓고 보면, 안세영이 준비해야 할 그림은 더 또렷해진다. 천위페이는 큰 실수 없이 점수를 정리하는 스타일이라, 결승에서 만나면 한 점 한 점이 길고 답답한 승부가 될 확률이 높다. 한웨는 기복이 있지만 몰아치기가 있어, 한 번 흔들리면 점수판이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 왕즈이는 ‘연속 득점’이 무기지만, 동시에 그만큼 경기 중 흔들리는 구간이 존재한다. 안세영에게 중요한 건 상대 이름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리듬을 경기 중간에 어떻게 끊어내느냐다. 안세영은 최근 큰 경기에서 이 ‘흐름 차단’을 정말 잘한다. 한 번 분위기가 상대에게 넘어가려는 순간을 억지로라도 멈추고, 길게 랠리를 늘려 상대가 먼저 급해지게 만든다. 왕즈이가 자주 무너지는 구간도 대개 이 지점이다. “내가 앞서는데 왜 점점 불안하지?”라는 감정이 들 때, 안세영이 정확히 그 불안을 키운다.
이번 인도오픈 초반만 봐도, 중국 선수들이 전부 시원하게만 이긴 건 아니다. 특히 한웨의 63분 역전승, 왕즈이의 32강 고전은 “아래 랭커도 한 번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반대로 말하면, 강자들이 끝내 이겼다는 사실은 “결국 마지막엔 힘으로 눌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승이 성사된다면, 그 경기는 ‘누가 더 강하냐’ 이전에 ‘누가 더 덜 지쳤냐’, 그리고 ‘누가 더 차분하냐’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흐름대로라면, 그 조건에서 안세영이 유리해 보이는 건 분명하다. 다만 대회가 뒤로 갈수록 압박은 커진다. “우승해야 한다”는 기대는 경기력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손목을 더 굳게 만들기도 한다. 안세영이 지금처럼 필요할 때만 속도를 올리고,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는 승리를 이어간다면, 결승의 그림은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팬들이 자주 놓치는 포인트가 있다. 중국 선수들이 ‘줄줄이 승승’이라 해도, 그 승리의 결이 다르다. 천위페이는 안정감, 한웨는 반전의 폭발력, 왕즈이는 롤러코스터 같은 흐름 속에서도 한 번에 뒤집는 힘. 이 셋 중 누가 결승에 오르느냐에 따라 안세영의 결승 전략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누가 이겼다”가 아니라 “어떻게 이겼다”를 보는 시선이다. 인도오픈은 이제 막 재미가 시작됐다. 안세영에게 길이 열렸다는 말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계산이 되려면, 반대편에서 서로를 깎아먹는 중국 선수들의 경기들이 어떤 모양으로 이어지는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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