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현의 자립 DNA를 깨우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제주의 서남쪽 대정(大靜)은 알싸한 마늘 냄새로 진동한다. 대한민국 마늘의 최대 주산지이자, 제주 농업의 가장 단단한 심장부.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대정에서 들려온 것은 풍년의 노랫소리가 아닌, 타들어 가는 농심과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는 한숨 소리였다. 기후위기로 봄볕은 지나치게 뜨거워졌고, 거세게 출렁이는 농산물 가격 앞에 농민들의 노력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청년들이 떠난 농촌을 지키는 농부들의 굽은 등 뒤로, 대정의 농업은 잔인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마늘밭 바로 옆에는 이국적인 고급 주택이 즐비한 영어교육도시와 화려한 신화역사공원이 서 있다. 외부 대자본을 끌어들여 만든 이 '외발적 성장 모델'은 대정의 땅값을 올려놓았지만, 정작 대정과 안덕의 주민들을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화려한 낙수효과는 없었고, 평생 흙을 일구어 온 이들이 소외되는 커뮤니티의 단절이 남았다. 대정 고유의 자립 DNA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결과였다.
사실 대정은 본래 '크게 평온한 땅'이라는 이름 뒤에 가장 뜨거운 자립의 역사를 품은 고장이다. 조선시대 1목 2현 체제에서 대정현은 제주 서부의 당당한 맹주였다. 1901년 중앙정부의 가혹한 수탈과 외세에 맞서 주민들이 스스로 총칼을 들었던 신축민란(이재수의 난)이 보여주듯, 대정의 역사적 뿌리는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때 주민 스스로 생존권을 지켜내던 '공동체 주권'에 있다.
이 강인했던 자립의 땅이 근현대를 거치며 일제의 '알뜨르 비행장' 수탈과 '제주 4·3 섯알오름 학살'이라는 국가 폭력의 거점으로 왜곡되었고 현대에는 거대 자본 중심의 개발 흐름 속에서, 정작 주민이 주체가 되는 성장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이제는 이러한 외부 의존형 성장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외부의 자본과 돈에 의존하는 개발을 멈추고, 대정이 가진 본연의 자립 DNA를 깨워 지역이 스스로 일어서는 '내발적 발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그 변화는 대정의 근간인 농업 현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기후위기에 맞서 밭농업 중심의 스마트 영농 체계를 과감히 이식하고, 땅을 살리는 친환경 생태 농업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도전을 해야 한다. 나아가 대정 앞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남방큰돌고래와 안덕의 깊은 허파인 곶자왈을 외지인의 관광지가 아닌, 주민 공동체의 공유 자산인 '생태 커먼즈(Commons)'로 자산화해야 한다. 척박한 땅을 일구며 생존해 온 대정의 자립 DNA가 뒷받침될 때, 이 생태 자산은 주민 모두의 삶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다.
이 담대한 구상은 현 정부의 핵심 기조인 '기본사회' 및 '기본소득' 비전과도 일치한다. 농어민의 공익적 기여를 인정하는 농어민기본소득을 시작으로, 알뜨르 비행장이라는 아픔의 공간을 지역 내에서 부가 순환되도록 돕는 공동체 부 구축(CWB) 방식의 '주민 주도형 평화 관광 자산'으로 전환하고, 글로벌 TNFD(기업이나 자산이 자연생태계에 미치는 위험과 가치를 계량화하는 자연 관련 재무정보 공개) 표준에 맞춰 가치를 인정받은 생태 자산에서 창출되는 수익을 주민 모두에게 '기본소득'으로 돌려주는 모델. 이것이 바로 제주도정이 지향하는 생태 자산화와 에너지 전환 정책을 농촌 현장에서 가장 실천적이고 온전하게 구현하는 방법이다.
나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대정에서 주민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 흐르던 땀방울 속에서 이 지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했다. 주민들의 목소리를 받아 적으며 정책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정치적 동반자이자 연대자로서, 나는 이제 단순한 관찰자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대정현의 변화를 이끄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현장의 모순을 파악하고 대안을 만들어갈 책임 있는 주체가 되고자 한다.
제주의 미래를 바꿀 혁신의 씨앗은 화려한 빌딩 숲이 아닌, 가장 치열하게 삶을 일구어온 읍면의 현장에서 자라고 있다. 과거 수탈과 소외의 변방이었던 대정이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대한민국 '기본사회 1번지'를 개척해 나갈 시간이다.

주식회사 제주스퀘어 대표이사로, 지역의 자산을 연결하고 비즈니스로 만들어가는 기획자이자 경영자이다. 제주스타트업협회(JSA) 부회장, 제주사회적협동조합협의회 사무국장, 제주도정소식지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제주의 로컬 생태계와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활발히 활동해 왔다. 온라인/모바일 기획, 콘텐츠 기획, 로컬 브랜딩, 리빙랩 기획운영 등다양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 중심의 정책과 솔루션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