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세데스-벤츠가 한 시대의 끝을 공식화했다. 브랜드 디자인을 상징해온 고든 바그너 최고디자인책임자(CDO)가 회사를 떠난다. 단순한 임원 교체로 보기엔 파장이 크다. 벤츠의 ‘얼굴’을 만든 인물이 무대에서 내려오기 때문이다.
고든 바그너는 1997년 벤츠에 합류해 약 30년간 브랜드 디자인을 이끌었다. 그는 특정 모델 하나로 기억되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벤츠가 전통적 럭셔리 브랜드에서 현대적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로 변모하는 전 과정에 관여한 인물이다. 이번 사임은 단순한 퇴임을 넘어, 벤츠 디자인 철학의 전환을 예고하는 신호로 읽힌다.
특히 전동화 전환 이후 흔들렸던 디자인 정체성과 맞물리며 이번 결정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벤츠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내려놓으려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고든 바그너가 만든 벤츠의 얼굴

고든 바그너는 SLR 맥라렌을 통해 이름을 알렸고, 2008년 39세의 나이로 벤츠 역사상 최연소 디자인 총괄 자리에 올랐다. 이후 A클래스(W176)를 통해 벤츠의 고객층을 젊게 확장했고, S클래스(W222)로 현대적 럭셔리의 기준을 재정의했다. 부드러운 곡선과 유려한 비례, 그리고 기술 친화적 실내 디자인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의 영향력은 자동차에만 머물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벤츠 스타일’ 조직을 통해 요트, 헬리콥터, 가구, 주거 공간까지 디자인 영역을 확장했다. 미국 마이애미의 메르세데스-벤츠 플레이시스 프로젝트는 자동차 브랜드가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 벤츠는 단순한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하이엔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포지셔닝을 강화했다. 바그너는 그 중심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구축한 인물이었다.
EQ 이후 흔들린 ‘벤츠다움’

평가가 엇갈리기 시작한 지점은 전동화 이후다. EQS를 필두로 한 EQ 라인업은 공기역학을 앞세운 유선형 디자인을 채택했지만, 소비자 반응은 냉담했다. 모델 간 외형이 지나치게 닮았고, 차급에 따른 위계가 흐려졌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특히 대형 디스플레이 중심의 실내 구성은 전통적인 벤츠 팬들에게 낯설게 다가왔다. 감성적 럭셔리보다는 기술 시연에 치우쳤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EQS가 출시 직후 대대적인 디자인 수정에 들어간 점은 시장의 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벤츠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은 결국 바그너 체제의 한계로 귀결됐다.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했지만, 브랜드가 오랫동안 쌓아온 감성과 무게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AMG 출신 후임, 방향 전환의 신호

벤츠는 바그너의 후임으로 메르세데스-AMG 디자인 총괄 바스티안 바우디를 내정했다. 그는 AMG 비전 그란투리스모, AMG ONE, AMG GT XX 콘셉트 등 강한 감성과 퍼포먼스 중심의 디자인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AMG 출신 디자이너를 전체 브랜드 디자인 수장으로 앉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벤츠가 다시 감성, 비례, 존재감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회귀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전동화 시대에도 브랜드 고유의 캐릭터를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향후 벤츠 디자인이 공기역학 수치보다 시각적 임팩트와 정체성 회복에 더 무게를 둘 것으로 전망한다. 삼각별이 다시 ‘보이는 럭셔리’를 강조할지주목되는 이유다.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서

고든 바그너의 퇴장은 벤츠 디자인 역사에서 분명한 분기점이다. 그는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지만, 30년간 브랜드의 외형과 이미지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벤츠가 오늘의 글로벌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 그의 공헌은 결정적이었다.
이제 벤츠는 전동화 이후의 럭셔리를 다시 정의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 기술 중심의 미래차 시대 속에서, 전통과 감성을 어떻게 이어갈지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 셈이다. 새 수장 체제에서 벤츠 디자인이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분명한 점은 하나다. 삼각별의 방향타가 바뀌는 순간, 벤츠는 또 다른 실험에 들어간다. 이번 사임은 끝이 아니라, 다음 장의 시작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