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자 김태형의 미래기술과 인문]
한국의 AI 개발 성적표 '빛과 그림자'
최근 미 스탠포드 대학교의 인간 중심 인공지능 연구소(HAI)에서 8번째로 내놓은 2025년 AI 인덱스 보고서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인공지능 시대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준다. 마치 거울처럼 이 보고서는 각국의 현주소를 비추는데, 한국의 모습은 유독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는 인구 대비 AI 특허 건수가 세계 1위라는 자랑스러운 소식이 들려온다. 산업용 로봇 도입률 역시 세계 4위로,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산업 기반의 강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숫자만 보면, 우리는 AI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 국가의 이미지를 떠올릴 법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숫자 뒤편에는 어딘가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세계 무대에서 진정한 게임 체인저가 될 만한, 주목할 만한 AI 모델 개발 실적은 2024년 단 1건에 불과했다. 미국의 40건, 중국의 15건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사람의 문제다. AI 시대를 이끌어갈 핵심 두뇌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미래의 잠재력이 새어 나가고 있음을 경고한다. 마치 화려하게 꽃을 피운 듯 보이지만, 정작 나무의 뿌리는 약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첫 R&D예산 대폭 삭감의 부작용들
2023년 하반기 한국 정부는 'R&D 효율화'라는 깃발을 높이 들었다. 2024년 R&D 예산을 전년 대비 14.7%, 약 4조 6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삭감하며, “비효율적인 나눠주기식 예산, 과학계 카르텔을 혁파하고, AI와 같은 핵심 전략 기술에 선택과 집중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낡은 관행을 깨고 미래를 향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겠다는 약속은, 그 자체로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효율화라는 이름의 메스가 향한 곳은 예상과 달랐다. 정작 도려내야 할 비효율의 종양보다는, 미래를 키워낼 건강한 세포들이 먼저 잘려나갔다. 예산 삭감의 칼날은 당장의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연구 분야, 그리고 미래의 희망인 젊은 연구자들의 삶을 파고들었다. 대학 연구실에서는 석박사 과정 학생들의 인건비 지급이 불안정해졌고, 최첨단 연구에 필수적인 장비와 재료 구매는 엄두를 내기 어려워졌다. KAIST를 비롯한 4대 과학기술원마저 정부 지원 연구 과제 수가 급감하고 과제당 연구비가 줄어드는 현실은, 정책의 목표와 현실 사이의 깊은 괴리를 보여준다

정부는 AI를 미래 먹거리로 지목하며 ‘전략 기술’이라 불렀지만, 정작 그 AI가 싹트고 자랄 토양인 기초연구와 인력 양성에는 물을 빼는 모순적인 행보를 보였다.
AI 기술은 진공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수학, 통계학, 물리학, 생명과학, 뇌과학 등 깊고 넓은 기초과학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끊임없는 실험과 실패를 용인하는 안정적인 연구 환경 속에서 비로소 혁신적인 AI 모델이 탄생할 수 있다.
스탠포드 보고서가 지적한 한국의 AI 모델 개발 부진은, 어쩌면 이러한 기초 토양을 스스로 척박하게 만든 정책의 예고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카르텔이라는 낙인 아래, 구체적인 문제 진단과 해결 노력보다는 일괄적인 예산 감축이 우선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연구 현장은 뿌리째 흔들렸고, 차세대 연구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연구 지속 자체를 고민하게 되었다. 스탠포드 보고서가 포착한 AI 인재의 순유출은,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현실에 대한 젊은 두뇌들의 응답일 것이다. 더 나은 연구 환경, 안정적인 미래를 찾아 떠나는 그들의 발걸음은 한국 AI의 미래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R&D예산 삭감 정책 실패가 남긴 교훈
세계는 지금 AI라는 새로운 대륙을 향해 돛을 올리고 경쟁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스탠포드 보고서에도 언급되었듯, 캐나다, 프랑스,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 중국과 같이 기술 초강대국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국가가 한국 보다 훨씬 많은 천문학적인 금액을 AI 연구와 인프라에 쏟아붓고 있다. 이는 단순한 투자를 넘어, 미래 국가 경쟁력의 사활을 건 전략적 행보이다. 이런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은 R&D 예산을 삭감하며 스스로 노를 젓는 속도를 늦춘 셈이다.

진정한 효율은 단순히 예산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위한 투자를 지속하고, 연구자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서 나온다.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은 연구 생태계를 교란하고, 젊은 인재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며,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키운다. 이는 단순한 예산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가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과학기술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볼 수 있다.
스탠포드 보고서가 보여준 한국 AI의 명암은, 우리가 지금 어떤 갈림길에 서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줬다. 특허와 로봇이라는 외형적 성과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선도적인 AI 모델 개발과 인재 양성이라는 근본적인 체력을 키우는 데 다시 힘을 쏟을 것인가.
R&D 예산 삭감이라는 정책 실험이 남긴 상처를 직시하고, 미래를 위한 진정한 투자가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야 할 때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구호가 아닌, 꾸준한 투자와 신뢰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글은 스탠포드 AI 인덱스 보고서의 데이터를 한국의 R&D 예산 삭감이라는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외부 자료와 연결하여 구성한 에세이이며, 스탠포드 보고서 자체가 한국의 예산 정책을 직접적으로 분석하거나 평가한 것은 아님을 밝힙니다. 출처: https://hai.stanford.edu/ai-index/2025-ai-index-report)
※ 필자인 김태형은 국가생명연구자원정보센터(KOBIC)에서 국내 최초의 한국인 유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초기 유전체 기업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15년간 사업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바이오 빅데이터 분석에 특화된 바이오 AI 기업, 바이오넥서스(BioNexus)의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