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에서 재벌까지: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빈농 출신으로 맨주먹 하나로 상경해 재계 57위 그룹의 총수까지 오른 그의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와 함께 그룹이 몰락하면서 그의 신화에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극적인 성공 신화의 시작
1948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안병균은 18세 때인 1966년 단돈 2,700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 영화 엑스트라, 중국집 배달원 등 온갖 일을 전전하며 돈을 모았다.
1969년, 그는 모은 돈으로 광화문 근처에 '왕자관'이라는 중국집을 열며 사업가의 길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어 1970년 '해녀'라는 일식집을 열어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1974년 화재로 인해 종업원 2명이 사망하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등 큰 좌절을 겪게 된다.
극장식당에서 의류업까지, 사업 영역 확장
좌절을 딛고 일어선 안병균은 1975년 서울 명동에 극장식 비어홀을 차렸다. 1977년 '초원의 집', 1979년 '무랑루즈' 등 극장식 식당을 연이어 개업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당시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고 이주일을 섭외해 공연을 열면서 "일단 한 번 와보시라니까요"라는 유행어와 함께 대박을 터뜨렸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안병균은 의류사업에 뛰어들었다. 1982년 나산실업을 설립하고 1983년 여성복 브랜드 '조이너스'를 출시했다. '조이너스'는 1994년 단일 브랜드로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해 기네스북에 오르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산그룹의 탄생과 급성장
안병균은 의류사업의 성공을 바탕으로 나산그룹을 설립하고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부동산 개발, 건설업, 유통업, 금융업, 방송사 경영, 프로농구단 창단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90년, 안병균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소득세를 납부한 인물로 주목받았다. 당시 그의 소득은 47억 400만 원으로, 23억 1,700만 원의 세금을 납부했다. 이는 삼성, 현대 등 대기업 총수들을 제치고 이룬 성과였다.
1994년 나산그룹은 9개의 계열사와 함께 3,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중견그룹으로 도약했고, 1997년에는 13개의 계열사와 1조 3,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재계 57위의 그룹으로 성장했다.
IMF 외환위기와 나산그룹의 몰락
그러나 19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나산그룹은 급격한 위기에 빠졌다. 1998년 1월 14일, 안병균 회장은 최종 부도를 선언하고 계열사 매각에 나섰다.
나산그룹의 몰락 원인으로는 무리한 사업 확장과 과도한 차입경영이 지목되고 있다. 특히 1994년부터 시작된 백화점 사업 확장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영동백화점을 인수한 후 광명, 수서, 천호, 강남 등에 백화점을 추가로 개점하면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다.
몰락 이후의 안병균
그룹 몰락 이후 안병균 전 회장은 재산 은닉 의혹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04년에는 횡령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현재 안병균 전 회장은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더리버사이트호텔 감사로 재직 중이며, 아내와 자녀들이 운영하는 기업들을 통해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병균의 유산과 교훈
안병균 전 회장의 성공과 몰락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IMF 외환위기의 교훈을 되새기며, 한국 경제가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고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안병균 전 회장의 이야기는 한국 경제의 역동성과 함께 무리한 확장의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교훈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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