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 속 70만원 주문 반가웠건만… 학교 행정주임이라던 ‘그놈’에 당했다
전화 주문 뒤 잠적하는 ‘노쇼 사기’ 급증 추세
작년 피해 7543건·1653억…소상공인 타깃
공공기관 사칭·대리구매 유도·단체예약 등
경기불황 시기 노리고 업종별 수법 교묘해져
지급정지 어려운 구조…“당해도 돈 못 찾는다”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에서 40년 넘게 유리와 거울을 제작해 온 홍관표 씨는 지난달 19일 ‘OO고등학교 행정실 주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학교에 필요하다며 장거울 8개를 주문하려고 하니 견적을 달라고 했다. 홍씨는 곧바로 견적서를 만들어 보냈다. 할인을 적용한 2차 견적까지 보내 조율한 뒤 거래를 확정했다. 납품 일정까지 약속했다. 거래액은 약 70만원. 홍씨는 “학교라고 하니까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며 “학기마다 새롭게 제작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아서 신뢰가 두텁다”고 말했다. 제작이 완료돼 납품만 앞뒀을 ‘행정주임’과의 연락이 끊겼다. 여러 차례 연락에도 응답이 없자 이상함을 느낀 홍씨는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그런 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홍씨는 “학교나 관공서는 한 달 단위로 결제하는 구조라 돈을 먼저 받을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된다. 이점을 노린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가짜 행정주임에게 주문받은 거울 8개는 매장 구석에 놓여있다. 주문자 필요에 맞춰서 제작한 거여서 다시 팔기도 어렵다고 한다. 홍씨는 “버리기도 아깝고 쓸 데도 없다. 그냥 쌓아둘 수밖에 없다. 40년 장사하면서 이런 사기는 처음”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노쇼(No-show) 사기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홍씨의 사례처럼 음식이나 물건을 발주한 뒤에 연락이 끊어지는 유형은 초창기 수법이다. 최근엔 더 교묘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대리구매’ 등을 요청해 금전적 피해를 주는 양상을 보인다. 매달 수백건의 노쇼 사기 피해가 보고되고 있다.
경찰청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 노쇼 사기 범죄 통계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노쇼 사기는 7534건·피해액은 1653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상반기 147억원 수준이던 관련 피해 규모는 하반기 들어선 1500억원으로 폭증했다. 올해 들어선 1월 687건(209억원), 2월 332건(188억원)이 보고됐다.

경찰이 처음 노쇼 사기만 따로 통계를 만든 건 지난해부터다. 그만큼 피해 신고가 물밀듯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단순 예약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사기 범죄로 봐야 할 수준까지 커졌다”며 “지금도 사건은 계속 들어오고 유형은 점점 더 다양하고 정교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소상공인들이 주로 사기의 타깃이 된다는 점. 관공서나 학교 등 선주문을 받고 나중에 한꺼번에 정산받는 관행으로 거래하던 곳의 직원이라고 밝히면 사장님들 입장에선 응할 수밖에 없다.
서울 영등포구청 관계자는 취재팀에 “최근 구청 직원이라고 속인 사기 전화를 받았다며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날만 해도 관내 현수막 제작업체와 서점 등에서 유사 전화를 받았다는 문의가 들어왔다. 작년 7월부터 이런 유형이 집중적으로 늘었고 최근에는 골목상권까지 확산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예산 남았다, 대신 사달라” 업종별로 설계
노쇼 사기는 이제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업종별로 설계된 ‘맞춤형 범죄’로 진화했다.
헬스기구 납품업을 하는 김모 씨도 올해 1월 비슷한 수법에 당했다. 그는 “남양주 관공서인데 예산 2000만원이 남았으니 그 금액에 맞춰 견적을 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러닝머신 등 물품 견적을 보내자 상대는 돌연 다른 물품을 함께 납품해달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차액을 가져가도 된다면서 전혀 다른 물건 구매를 유도하더라”며 “명함도 보내주고 기관 이름과 직함까지 실제처럼 쓰여 있어서 정상 거래처럼 보였다”고 했다. 이어 “결국 120만원 정도 손해를 보고 나서야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이 같은 방식은 다른 업종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철물점이나 건설업체를 상대로는 구청이나 재무과 직원으로 속여 말해 공사 계약을 제안한 뒤 방진마스크·소화기·자동제세동기 등을 대신 구매해달라고 요구한다. 큰 계약을 먼저 제시해 신뢰를 확보한 뒤 추가 구매를 요구하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제3의 업체’가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특정 업체를 소개하고 그곳에 돈을 입금하도록 유도한 뒤 잠적하는 방식이다.
식당을 노린 수법도 여전히 반복된다. 공무원 방문이나 회사 회식을 이유로 단체 예약을 잡은 뒤 “양주나 와인을 미리 준비해달라”고 요구하고 나타나지 않는 식이다. 국내 최대 자영업자 커뮤니티 ‘아프니까 사장이다’에서는 “7시·12명·회사 회식”처럼 반복되는 예약 패턴이 사기 신호라는 정보까지 공유되고 있다.
건설업체를 겨냥한 수법은 더 정교하다. 과거 공사 이력이나 금액을 정확히 언급하거나 실제 내부 인물 이름까지 활용해 신뢰를 쌓는다. 이처럼 노쇼 사기는 ▷공공기관 사칭 ▷대리구매 유도 ▷단체예약 ▷거래이력 활용 등 여러 형태로 분화됐지만 구조는 동일하다. 작은 거래로 시작해 신뢰를 만든 뒤 점차 금액을 키워 돈을 빼내는 방식이다.
일선 경찰도 이 같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서울의 일선 경찰서 관계자는 “노쇼 사기 사건은 지금도 계속 접수되고 있고 일선서로 꾸준히 들어오는 상황”이라며 “전화금융사기처럼 유형별로 나눠 대응할 정도로 범죄가 확산됐다”고 말했다.
특히 “경기가 어려울수록 업체들이 거래에 더 민감해지는데 이 점을 노려 각 업종에 맞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접근하는 구조”라며 “전화 받는 입장에서는 실제 거래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했다.
“막기 어려운 구조” 법·제도도 ‘사후 대응’ 한계
노쇼 사기는 현행법상 구조적으로 대응하기 까다로운 범죄다. 현재로서는 애초에 당하지 않으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경찰이나 지자체가 꾸준히 범죄 예방 홍보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한기성 서울청 광역예방순찰대 경사는 “현재 노쇼 사기 사건이 접수되면 서울청으로 신속 이관해 처리하고 있고 본청 차원에서도 유형을 정리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전기통신금융사기 대응 체계 안에서 함께 관리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지역 경찰에는 예방 활동을 강화하라는 지시도 내려온 상태”라며 “현수막·안내·순찰 등을 통해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대응 구조다. 노쇼 사기는 재화·용역 거래 형태를 띠기 때문에 보이스피싱처럼 금융사가 즉시 계좌를 동결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인지하더라도 경찰 판단을 거쳐야 지급정지가 가능하다. 정부는 경찰과 금융당국 협의를 거쳐 다음달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방지 및 피해구제 표준 업무방법서’를 개정할 계획이다. 기존의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적용할 소지가 있다면 보이스피싱 범죄에 준하는 조치(계좌 지급정지, 자금 환수 등)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김형원 법무법인 YK 변호사는 “노쇼 사기는 일반 상거래와 형태가 유사해 즉각적인 지급정지 적용이 어렵다”며 “지급정지를 쉽게 허용하면 정상 거래까지 막히거나 제도 남용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 노쇼는 사기죄가 아니라 업무방해에 가까운 경우가 많고 금전적 이익이 발생해야 사기죄가 성립한다”며 “보이스피싱 대응 체계도 10년 이상 걸린 만큼 동일 수준으로 바로 격상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수사는 사후 대응일 수밖에 없다”며 “에스크로 결제 활용·공공기관 거래 시 유선 확인 등 예방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명섭 법률사무소 재건 변호사도 “노쇼 사기는 매출을 만들어주겠다는 유혹과 기관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건드리는 범죄”라며 “경기가 어려울수록 자영업자들이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어 “관공서 사칭은 ‘공무원이 돈을 떼먹겠느냐’는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라며 “거래 요청이 들어오면 반드시 공식 연락처로 사실 확인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주원·김도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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