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오픈이 다시 ‘안세영의 무대’가 됐다. 수원실내체육관을 가득 채운 응원 속에서 안세영은 타이완의 치우 핀치안(또는 주빈젠으로도 표기)과 맞붙어 2-0(21-13, 21-8) 완승을 거두고 8강에 올랐다. 경기 시간은 43분. 스코어와 시간만 봐도 알 수 있듯, 위기 없이 매끄럽게 끝냈다. 1게임 초반 3-3 탐색전 뒤 곧바로 12-6까지 벌렸고, 13-11에서 20-11까지 7점을 연속으로 쓸어 담으며 흐름을 끊지 않았다. 2게임 시작과 동시에 7-0 러시는 사실상 승부를 마무리한 장면이었다. 상대는 역습 타이밍을 잡아보려 했지만, 안세영의 수비망을 넘는 볼은 드물었다.

이날 경기력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질식 수비’. 바닥을 스치듯 낮게 미끄러져 건져 올리는 리커버리와 짧은 스텝 전환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공격을 끝내려 달려드는 상대의 샷을 두 번, 세 번 버티며 “한 번 더”를 강요하자 상대의 힘이 먼저 빠졌다. 둘째, 템포 조절. 때릴 듯하다가 반 박자 늦춰 네트 앞에 툭 떨어뜨리는 헤어핀, 허리를 비틀며 각을 숨기는 하프 스매시가 교차했고, 코스 예측을 무의미하게 만든 속임 동작이 몇 차례 결정구로 꽂혔다. ‘강타 일변도’가 아니라 속도·각도·높이를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랠리의 리듬을 완전히 지배한 셈이다.

이번 8강 진출은 의미가 크다. 안세영은 2022·2023년 코리아오픈을 연속 제패했다. 지난해에는 파리 올림픽 금메달 이후 무릎과 발목을 관리하며 출전을 건너뛰었는데, 2년 만에 돌아온 안방 대회에서 다시 정상 사냥에 시동을 걸었다. 대진 여건도 나쁘지 않다. 세계 2위 왕즈위, 3위 한웨, 그리고 맞대결 때마다 까다로웠던 5위 천위페이(이상 중국)가 이번 대회에 불참했다. 강적 공백이 곧 자동 우승을 보장하진 않지만,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타이틀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다.

무엇보다 컨디션의 흐름이 좋다. 불과 사흘 전 중국 선전에서 열린 중국 마스터스(슈퍼 750) 결승에서 한웨를 33분 2-0(21-11, 21-3)으로 제압하며 대회 2연패를 이뤘다. 시즌 전체로 보면 말레이시아오픈, 인도오픈, 오를레앙 마스터스,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 일본오픈, 중국 마스터스까지 이미 7승. 이번 코리아오픈에서 우승하면 시즌 8관왕, 그리고 2개 대회 연속 정상이라는 이정표가 추가된다. “체력은 괜찮을까”라는 질문에, 오늘 43분 완승은 가장 간단한 답이었다.
경기 외적인 장면도 눈에 띈다. 홈 팬들 앞에서 보여준 태도는 늘 같았다. 샷 하나에도 박수가 쏟아지면 손바닥을 들어 답하고, 코트 밖에서는 외국 선수들에게 한국식 간식 선물을 챙기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팬과 동료, 라이벌을 동시에 존중하는 태도는 ‘최강자’의 무게를 더 품격 있게 만든다. 결국 이런 안정감이 코트에서의 선택에도 스며든다. 급할 때 더 서두르지 않고, 앞설 때 과하게 힘주지 않는 운영. 강함과 단단함은 다르지만, 안세영은 둘을 동시에 보여준다.

물론 앞으로의 길이 전부 평탄한 건 아니다. 8강 상대는 일본의 미야자키 토모카. 스트로크 품질이 좋아 랠리 질을 끌어올리는 타입이라 방심하면 경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안세영에게 필요한 건 오늘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유지하는 일이다. 첫째, 리시브 첫 터치의 퀄리티. 낮고 길게, 혹은 짧고 낮게 상황에 맞는 선택을 이어가야 미야자키의 잔실수를 유도할 수 있다. 둘째, 네트 앞 주도권. 헤어핀 승부에서 50 대 50을 60 대 40으로만 올려도 후속 스매시나 클리어의 효율이 급상승한다. 결과적으로는 ‘첫 세 박자’를 누가 더 오래 쥐느냐의 싸움이다.
이번 대회가 지니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서브 시퀀스’다. 중국 마스터스 이후 안세영은 서브 루틴을 단순화하며 리듬을 예민하게 잡고 있다. 플랫 서브로 백코트를 누르고, 곧바로 하프스매시나 드롭으로 타점을 바꾸는 2단 구성은 상대 리시브 라인을 한두 발 뒤로 밀어내는 효과가 있다. 오늘 2게임 초반 7-0 스타트가 가능했던 것도, 첫 두 포인트에서 서브-리턴-서드샷이 매뉴얼처럼 깔끔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8강 이후 상위 라운드에서도 같은 매뉴얼이 유지된다면, 체력 소모를 줄이면서도 점수는 빠르게 쌓아갈 수 있다.

결국 안세영의 강함은 “한 샷이 강하다”가 아니라 “모든 국면이 단단하다”에서 출발한다. 랠리가 길어져도 표정이 변하지 않고, 어려운 볼을 세 번 버틴 뒤 네 번째를 득점으로 바꾸는 집요함이 상대의 멘털을 갉아먹는다. 코치진의 플랜도 명확하다. 초반에는 긴 볼로 길들이고, 중반에는 템포를 섞고, 후반에는 네트 앞에서 승부를 끝낸다. 오늘 경기 흐름은 그 교본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사례였다.
이제 남은 건 마무리다. 2년 만의 안방 복귀전은 순항 중이고, 시즌 8승을 향한 엔진은 충분히 뜨겁다. 안세영이 코리아오픈 트로피를 다시 들어 올린다면, 이는 단순한 ‘통산 몇 승’ 이상의 메시지를 남길 것이다. 세계최강의 자리는 기록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매 라운드 같은 태도와 같은 품질로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 오늘 43분의 압축 파일이 그 사실을 또렷하게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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