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추석 그 後 … 독립문 시장에서 만난 '민생의 표정'
視리즈 추석 후 민생의 민낯 1편
추석 직후 찾은 독립문 영천시장
추석에 사람 없어 휑했던 시장
지난해보다 매출 40%가량 줄어
차례상 차리기 부담 느낄 정도로
야채, 축산물 등 식품물가 치솟아
상인들은 언제쯤 웃을 수 있을까
장소 : 독립문 영천시장
일시 : 2024년 9월 24일 오후 7시 25분
단골손님 : 사모님은 어디 가셨어?
떡집사장 : 골골거리다가 병원에 갔어.
단골손님 : 왜, 어디 아프셔?
떡집사장 : 아니, 그냥저냥….
단골손님 : 아프면 안 되는데, 요즘 같은 시절에….
# 추석이 막 끝난 어느날. 어둠이 내려앉은 떡집 앞에서 두 사람은 익숙한 듯 짧은 대화를 나눴다. 으레 주고받던 안부가 아니었다. 정겹지도 않았다. 드문드문 이어진 말과 말 사이엔 '걱정'이 실렸다. 비단 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언젠가부터 전통시장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생기도 활력도 어디론가 빠져나간 지 오래다. 팬데믹, 경기침체, 고물가를 탓하기엔 그 적막함이 너무나 깊고 독하다. '폭염 추석'이라 일컬어진 이번 9월에도 시장 곳곳엔 '한숨'이 가득했다.
# 그런데도 정부는 "전통시장을 위해 발행한 온누리상품권이 흥행했다"면서 자찬을 늘어놓는다. 이번엔 온누리상품권을 병원이나 스크린골프장(시장 내)에서도 쓸 수 있도록 허용해 놓고 "전통시장을 위했다"고 말하니, 시장 사람들은 어이 상실이다.
# 어디 이게 시장뿐이랴. 민생은 견디기 힘들 정도인데, 높으신 양반들이 내놓은 정책은 도무지 아픔을 헤아려주지 못한다. 더스쿠프가 추석 그 후 민생의 민낯을 시장에서 찾아봤다.
유례없는 '폭염 추석'이 불청객처럼 찾아온 전통시장. 달라진 건 못 참을 만큼 더워진 기온만이 아니었다. 텅 빈 시장은 좀처럼 활력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추석이 끝나자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몰려온다. 상인들은 또 내일을 걱정한다. "언제쯤이면 먹고사는 게 편해질까?" 이게 비단 상인들의 이야기일까. 더스쿠프가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영천시장을 찾았다. 추석 그 후, 첫번째 편이다.
"지난해 추석은 시장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해 천천히 걸어다녀야 했어요. 올해 추석은 휑해서 뛰어다녀도 될 정도였습니다."
추석 연휴가 지난 후인 9월 24일 오전 9시에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영천시장. 수산물 점포를 운영하는 양건민(31)씨는 좌판에 꽃게가 담긴 박스를 올려놓으며 한숨 섞인 말을 건넸다. "예전엔 한 번에 5만원씩 사가던 단골 손님도 요즘엔 2만원씩 사가요. 손님들이 지갑을 열지 않으니 지난해 추석 즈음보다 매출이 40%가량 줄어든 것 같아요."
이번 추석은 반팔을 입고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폭염 추석'이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은 서울에 역대 가장 늦은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40년간 이곳에서 과일 장사를 해온 김은숙(67)씨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밖에 나오질 않더라고요. 일도, 취미도 과일 파는 것뿐인데, 해가 갈수록 안 좋아지기만 해. 올해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년엔 더 걱정이에요. 얼마나 더울지…."
은숙씨가 한풀 꺾인 더위를 걱정하는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전기요금 때문이다. 그녀는 "에어컨을 트는 게 무서워서 선풍기만 돌렸는데도, 지난해에 비해 전기요금을 7만원이나 더 냈다"고 토로했다.
32년째 떡집을 운영하고 있는 강정모(63)씨는 올해부터 떡 한팩(모시송편 4개)의 가격을 2000원에서 2500원으로, 500원 올렸다. 정모씨는 "단골손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그대로 두려고 했지만, 원재료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정모씨의 말에 따르면 떡에 들어가는 호박고지 15㎏은 지난해 3만원에서 올해 7만~8만원으로 올랐다. 동부콩가루는 40㎏에 5만원에서 2배인 10만원이 됐다.
가격이 오른 건 떡의 원재료뿐이 아니다. 웬만한 건 다 올랐다. 정육점 사장 박종복(66)씨는 "80~90㎏ 돼지 한 마리가 지난해 50만원이었는데, 올해는 70만~80만원"이라며 한탄했다. 폭염으로 돼지들이 폐사한 탓이다. 올해 6월 10일부터 9월 12일까지 폭염으로 폐사한 돼지와 닭 등의 가축은 142만여 마리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90만3478마리에서 57.6% 증가한 수치다.
어디 이뿐이랴. 소비자들이 차례상을 차리는 데 부담을 느낄 정도로 식품물가 역시 치솟았다. 야채 가격은 '헉'소리 나게 올랐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농산물유통정보(KAMIS)에 따르면 9월 24일 기준 배추 1포기 가격은 9474원이었다. 지난해 가격 6193원보다 52.9%나 올랐다. 오이(다다기 계통) 10개 가격은 1만3480원으로, 지난해(1만1709원)보다 15.1% 상승했다.
야채 가격이 오른 이유는 유난히 길었던 폭염 탓에 생산량이 쪼그라들어서다. 수산물 역시 고온 등으로 어획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가격이 뛰었다. 축산물 가격도 상승세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9월 24일 기준 돼지고기 삼겹살 100g의 평균 가격은 2770원으로 지난해(2622)에 비해 5.6% 상승했다.
고물가가 민생을 덮치자 정부는 갖가지 민생 대책을 내놓았다. 정부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위한 추석 민생 안전대책으로 온누리상품권 특별 할인 판매를 시행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당초 3000억원 규모로 준비했던 상품권은 총 4061억원어치가 팔려나갔다. 이마저도 발매 3일 만인 9월 5일 품절돼 1조원 규모의 2차 판매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흥행과는 별개로 전통시장에선 온누리상품권 흥행 효과를 느끼기 어려웠다. 정부가 온누리상품권 가맹 제한 업종을 40종에서 28종으로 대폭 완화했기 때문이다. 온누리상품권 사용처가 지나치게 많아지자 온누리상품권은 온전히 전통시장에서만 유통되지 않았다.[※ 참고: 이 이야기는 파트2 온누리 상품권 체감 안 된 까닭에서 자세히 다뤘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긋지긋한 상황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일단 변곡점이 생기긴 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ㆍFed)는 9월 18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하는 '빅컷'을 단행했다. 경기침체를 우려해 '돈을 풀기'로 결정한 거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도 연내에 금리인하 행렬에 동참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리면 유동성이 좋아져 시장에 활력이 감돌 수 있다.
문제는 그게 언제쯤이냐는 거다. 들썩이는 집값과 급증하는 가계부채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은의 피벗(기준금리 인상ㆍ동결 기조에서 인하로 통화정책 변경ㆍPivot)이 늦어질 수 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했을 때 물가가 더 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 연준이 어쩌든 한은이 뭘 하든 시장 사람들 앞엔 '수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거다. 어느덧 오후 7시. 퇴근하다 들른 듯한 한 단골손님이 떡을 고르면서 떡집 사장에게 툴툴거렸다. "어휴 너무 비싸…." 사장이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읊조렸다. "참, 먹고살기 힘드네…." 영천시장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졌다. 내일은 좀 웃을 일이 있을까.
홍승주 더스쿠프 기자
hongsa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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