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 트레킹의 '심장'…칭기즈칸도 못 건드린 땅
조지아 여행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코카서스산맥 트레킹. 그 트레킹을 가장 멋지게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스바네티Svaneti이다. 중앙 코카서스산맥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하는 스바네티는 코카서스에서 가장 높은 거주 지역으로 3,000~5,000m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코카서스의 가장 높은 봉우리 10개 중 4개가 이곳에 있다.
험난한 지형으로 외부 접근이 어려웠던 스바네티는 특별한 역사와 건축물,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폐쇄된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칭기즈칸이 조지아를 침략했을 때도 워낙 오지였던 스바네티 지역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특히 겨울에는 많은 눈으로 세상과는 거의 고립되어 있었지만 2011년 주그디디Zugdidi와 메스티아Mestia 도로가 완공되면서 일 년 내내 접근이 가능해져 관광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메스티아로 이동은 그리 쉽지 않다. 트빌리시에서 차량으로 10시간 가까이 걸리니 꼬박 하루를 길에서 소비해야 한다. 메스티아는 스바네티의 심장부이며, 트레킹이나 하이킹을 목적으로 이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객에게는 거점도시이다.
스바네티는 눈 덮인 설산과 협곡이 특징이고. 9세기부터 지어진 방어용 석조 구조물인 코시키Koshki가 남아 있다. 스반 타워Svan Tower라고도 부르는 코시키는 수세기 동안 페르시아, 몽골, 터키 등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스반족을 보호해 준 탑 형태의 주거와 감시방어용 건축물로 1996년에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쿠타이시Kutaisi에서 미니버스인 마슈르카를 타고 메스티아로 가는 길은 도로 상태부터 심상치 않다. 지반이 무너진 곳도 여러 곳이고 도로 갓길은 절벽인데 난간조차 없는 곳이 태반이다. 게다가 마주 오는 차량이 대형인 경우에는 비켜가기 위해서 곡예 운전도 서슴지 않는다.
코룰디 리지 트레일
(편도 약 9.2km, 해발고도 1,400~3,326m)
메스티아는 한눈에 다 보일 만큼 크지 않은 마을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사방이 모두 설산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아도 행복한 공간이다. 메스티아에서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곳이 코룰디호수Koruldi Lakes. 코룰디호수는 호수에 비친 반영과 4,710m의 장엄한 쌍둥이 봉우리산인 우쉬바산Ushba Mountain의 환상적인 조화로 조지아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많은 곳이다. 대부분 택시나 미니버스로 코룰디호수까지 이동하지만 메스티아부터 걷기로 했다.
트레일은 세티 광장Seti Square에서 시작된다. 첫 번째 목적지는 메스티아 북쪽의 차카자가리산Tshakazagari Mountain에 있는 십자가이다. 다행히 와인 하우스 앞에서 트레일 표지를 쉽게 발견했다. 흰색과 빨간색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표시는 유럽 알프스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하다. 이제 트레일 표지만 따라서 걸으면 된다. 1.3km 지나서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된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등에 내리쬐는 햇빛이 살인적이다. 벌써부터 숨이 차다. 인적이 거의 없는 숲속 오솔길은 너무나 조용하다. 간간이 나무들 사이로 얼굴을 보여 주는 우쉬바산이 날 위로해 준다. 작은 풀 한 포기,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이름 모를 많은 야생화들이 모두 나의 친구이다.
차카자가리산에 있는 십자가에 도착. 저 멀리 우쉬바산이 장엄하게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코카서스산맥의 설산들이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다. 참으로 많은 고산과 설산을 트레킹했지만 이렇게 많은 산들이 줄을 지어선 모습은 처음이다. 뜨거운 여름날의 설산 풍경도 놀라운데 초원에는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가 너울너울 춤을 춘다. 뭐라 설명하고 뭐라 표현해야 하나? 한참동안 미동도 못 하다가 천천히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사진과 동영상도 찍었다. 가슴은 계속 방망이질한다.
눈앞에 도열한 설산, 그 아래로 흐드러진 야생화
완만한 능선을 따라 호수까지 걷는 길은 천상의 산책길이다. 한여름인데도 아직 눈이 많이 남아 있다. 잔설과 초원의 어우러짐은 마치 씨실과 날실이 엮어낸 한 폭의 그림 같다. 등로 찾기도 쉽다. 십자가부터 코룰디호수까지는 길이 다 보여서 지도가 필요 없을 정도. 설경에 취해서 걷고 있는데 한 무리의 차량 행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산으로 올라간다. 걸어가는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아주 무례한 행동이다.
코룰디호수에 가까이 오니 관광객을 태우고 온 차량들이 줄을 지어 있다. 차량을 이용하면 걷는 수고도 없이 호수 근처까지 이동할 수 있다. 코룰디호수에서는 다음에 다녀올 찰라디빙하 방향까지 조망된다. 호숫가의 빨간 텐트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림 같은 멋진 풍경에 빨간 텐트라니? 이곳에서 일몰, 일출을 보는 캠퍼는 얼마나 황홀할까? 왜? 나는 텐트를 조지아에 가져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조지아에서 지정된 캠핑사이트는 사전에 퍼밋이 필요하지 않고 언제나 캠핑이 가능했다.
우쉬바산 쪽을 바라보니 코룰디능선에 아주 조그마한 십자가가 보였고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예정된 목적지는 코룰디호수였지만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조금 더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코룰디능선의 십자가로 향하기 전에 드론을 올렸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일단 풍경부터 감상한다. 상공에서 펼쳐지는 광활한 자연 풍경은 그야말로 장엄하다. 영상 촬영 시작! 그런데 갑자기 '통신 연결 안 됨' 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잠시 후 드론 통제가 불가능지고 어디로 낙하되었는지 드론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드론의 현재 위치를 모니터링하면서 정신없이 뛰었다. 다행히 드론은 찾았지만 네 개의 다리 중 하나가 파손되었고 두 개의 프로펠러는 공중분해되었다. 그나마 드론 기체를 찾은 게 다행.
이젠 드론 영상을 찍지 못하니 드론은 배낭에 넣고 코룰디 리지를 향해서 산을 오른다. 코룰디호수는 해발 2,740m. 십자가가 있는 능선은 3,300m이므로 호수에서 고도를 560m를 더 올려야 한다. 만만하게 보았던 560m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경사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등로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눈이 많아서 넘어서지 못하는 구간이 많다 보니 이리 저리 돌고 돌아서 그냥 목표물만 향한다. 눈이 없는 곳은 부서진 셰일shale로 너무 미끄러워서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바로 앞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점점 더 멀어져간다. 이따금 십자가를 다녀오는 이들이 나에게 "화이팅"을 외쳐 준다.
와이드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 같은 풍경
내 어깨 옆으로 펼쳐졌던 코카서스산맥이 저만치 발아래에 줄지어 있다. 하얀 고깔모자를 쓴 코카서스산맥, 잔설에 둘러싸인 코룰디호수, 눈 위를 뛰어다니는 한 무리의 말떼, 한 마리의 콘도르처럼 코카서스를 힘차게 날고 있는 패러글라이더. 와이드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사진으로 보았던 풍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 무시한 스케일과 색감에 눈을 뗄 수 없다.
십자가가 바로 코앞인데. 다시 내려갔다가 올라가야 하는 길 앞에 섰다. 실망에 빠져 있는데 내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십자가까지 가도 조망은 크게 차이가 없다며 여기서 내려갈 것을 권한다. 내려가는 길도 쉽지만은 않다는 충고를 서슴지 않는다. 정상에 오르는 것도 아닌데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나는 메스티아까지 걸어가야 하니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포기하고 내려오면서도 뒤돌아보며 십자가를 몇 번이나 올려다본다. 깨끗하게 단념하는 것 또한 내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역시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조금 수월하다. 눈 쌓여 있는 구간을 스키 타듯 미끄러져 내려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가 시도해 보니 너무 미끄럽고 위험하다. 조금 시간이 걸려도 올라올 때 우회한 길을 걷는다. 셰일 구간은 거의 스키 타듯 내려와야만 했다.
코룰디호수를 지나니 길이 조금 편해진다. 올라올 때 보았던 작은 카페에서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은 욕심에 발길이 빨라진다. 그러나 카페엔 그 흔한 레모네이드도 없다. 이름 모르는 탄산음료를 한 잔 마시며 종일 긴장했던 마음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준다. 이곳 나무 테라스에 앉으니 주변 산군이 모두 다 펼쳐진다. 코카서스산맥이 카페의 정원이다. 이곳에서 만난 러시아 커플은 멋진 인증 사진을 남기느라 바쁘다. 그 모습이 참 귀엽다.
이제 마을까지는 4km 정도 남았다. 1시간이 채 안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서두른 나머지 길을 반대방향으로 잡았다. 아주 오래된 등로인지 길에는 오래된 나뭇잎이 수북하고 잡목들이 길을 막아서 거의 들개 사냥하듯 힘겹게 내려왔다. 빨리 내려오려던 계획이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아무리 급해도 실은 바늘귀에 끼워야 했는데. 그나마 무사히 내려온 것이 다행이다. 언제 어디서든 안전이 최우선이다.
메스티아에서 1,800m 가까이 고도를 올려야 했던 코룰디 리지 트레일은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코카서스산맥의 파노라마와 우쉬바산의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설경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니 충분한 보상을 받은 셈이다.
다음에 다시 코룰디 리지 트레일을 가게 된다면 차카자가리산에 있는 십자가까지는 차로 이동하고 코룰디 리지 십자가까지 조금 더 천천히 여유 있게 트레일을 즐기거나 코룰디호수에서 하룻밤은 캠핑하고 코룰디 리지 트레일을 걷고 싶다.
찰라디빙하 트레일
(편도 약 2.5km, 해발고도 1,600~1,910m)
메스티아에서는 만년설뿐 아니라 가까이서 빙하를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빙하가 갈라져서 떨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바로 찰라디빙하Chalaadi Glacier이다. 찰라디빙하 트레일은 메스티아 중앙 광장부터 걸으면 편도 약 9km. 메스티아 찰리교Mestia Chali bridge 입구까지 약 6.5km는 전에는 단지 조금 지루한 임도길이었지만 지금은 메스티아찰라강Mestiachala River의 수력발전 댐 건설로 인해 차량통행이 많아져서 먼지가 펄펄 날리는 걷고 싶지 않은 길이 되었다.
지난 5일간 스바네티 트레킹과 쉬카라빙하 트레킹으로 몸이 좀 고생을 했으니 하루는 널널하게 쉬려고 미니버스를 예약했는데 오늘 신청자는 나 혼자. 택시로 이동하고 시간도 자유로우니 프라이빗 택시를 타고 온 셈이다.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메스티아찰라강의 옥색 물빛이 투명하게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하다.
곳곳이 구멍 난 스릴 만점의 출렁다리
택시 기사의 배웅을 받으며 들머리인 메스티아 찰리교 앞에 섰다. 멀리서 볼 때는 그냥 조금 위험하다 싶었는데 정말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다리가 맞나 싶을 정도이다. 흔들거리는 것도 무서운데 다리 중간 중간에 구멍이 나서 강물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조지아는 입장료나 주차료가 없어서 좋기는 한데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는 곳이 의외로 많다. 아프리카만큼 안전 불감증이다. 초긴장을 하고 한발 한발 발을 옮겼다.
강을 건너니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길은 너덜길. 땅을 보며 천천히 걸어야 안전하다. 등로 왼쪽으로는 메스티아찰라강이 거세게 흘러간다. 노란색과 흰색의 트레일 표시만 따라 가면 길 찾기도 쉽다.
빙하까지 1km 정도 남은 지점부터는 완전 돌밭이다. 이때부터 찰라디빙하의 모습을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다. 흙이 쌓여 있다고 생각했던 덩어리는 빙하 앞으로 가보니 완전 돌덩어리같이 딱딱하고 엄청나게 두터운 레드닉 샬라트Lednik Chalaat빙하이다. 저곳의 높이는 해발고도 2,456m. 차틴타우산Chatintau Mountain에서부터 이어진 빙하이다. 왼쪽으로는 우쉬바산도 살짝 얼굴을 보여 준다. 엄청난 양으로 녹아서 쏟아져 내리는 빙하물이 무서운 속도로 흘러간다. 매일 이렇게 녹아내리는 데도 아직 저렇게 많이 남아 있다니! 계곡에는 두터운 빙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빙하를 바라보며 간식도 먹고 휴식도 취한다. 한여름인데도 빙하 덕분에 바람이 시원하다. 내려오는 길엔 누군가 설치해 놓은 해먹에서 낮잠도 잤다. 찰라디빙하 트레일은 입장료도 없을 뿐 아니라 1시간을 채 걷지 않아도 거대한 빙하를 만날 수 있는 메스티아의 매력적인 트레일이다.
코시키
메스티아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코시키는 특히 코룰디호수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 많다. 드물기는 해도 거주용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 4~5층 높이인데 1층은 가축우리, 2층은 주거 공간이고, 3~5층은 무기 등을 보관하거나 적의 침입 여부를 확인하는 망루로 사용되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구조가 아니라 외부에서 사다리를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탑의 내부에서는 나무 사다리를 이용해서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적의 침입 시에는 나무 사다리만 제거하면 적으로부터 보호가 용이하고, 각층에는 창문이 있어서 적의 침입 여부를 확인하고 적이 침입할 때는 돌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았다. 현재 스바네티 지역에는 메스티아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코시키가 200여 개 남아 있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