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네 단골 가게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주인과 굳이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얼굴만 보면 알아서 늘 먹던 것을 내어 주는 곳입니다. 그런 가게는 단순히 밥을 사 먹는 곳이 아니라, 고단한 하루를 잠시 내려놓는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정대식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35년 동안 버스 기사로 일하다 5년 전 은퇴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에서 시설 관리 일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는 3년 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두 딸은 결혼해 각자 지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버스 기사 시절 대식 씨는 승객들 사이에서 친절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짐을 든 노인이 타면 내려서 짐을 올려 주었고, 정류장에서 뛰어오는 학생을 보면 문을 다시 열어 주었습니다. 퇴직하던 날에는 단골 승객 몇 명이 꽃다발을 들고 종점까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아내를 보낸 뒤 대식 씨의 아침은 늘 비어 있었습니다. 아내가 차려 주던 밥상이 사라지자 혼자 밥을 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빈속으로 출근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몸무게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아내는 3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남편의 도시락을 쌌습니다. 새벽 첫차를 몰던 시절에는 김밥을 말아 은박지에 싸 주었습니다. "운전하다 신호 걸리면 한 개씩 드세요." 그 김밥 덕분에 대식 씨는 35년 동안 한 번도 빈속으로 핸들을 잡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 앞 골목에서 작은 김밥집을 발견했습니다. 두 평 남짓한 가게에서 일흔 살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혼자 김밥을 말고 있었습니다. 가게 앞 메뉴판에는 '야채김밥 2,000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대식 씨는 김밥 한 줄을 사서 지하철 안에서 먹었습니다. 밥알이 고슬고슬하고 단무지가 아삭했습니다. 무엇보다 집에서 아내가 싸 주던 김밥 맛과 꼭 닮아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대식 씨는 매일 아침 그 김밥집에 들렀습니다.
몇 주가 지나자 할머니는 대식 씨가 가게 앞에 서기만 해도 김밥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야채김밥이지요? 기사 양반, 얼굴이 많이 상했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우?" 할머니의 투박한 말 한마디에 대식 씨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손님이 없을 때면 가게 앞 작은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대식 씨가 김밥을 기다리는 몇 분 동안 두 사람은 날씨 이야기, 물가 이야기를 짧게 나누었습니다. 혼자 사는 대식 씨에게 그 몇 분은 하루 중 유일하게 누군가와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식 씨는 할머니가 김밥 한 줄에 2,000원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요즘 물가에 그 값으로는 재료비도 빠듯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할머니의 손은 관절염으로 마디마다 굵게 부어 있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사연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게 벽에는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고, 할머니는 가끔 그 사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번은 대식 씨가 조심스럽게 묻자 할머니가 짧게 대답했습니다. "영감은 먼저 갔고 아들은 멀리 살아. 혼자 먹고살려니 이거라도 해야지."

그래서 대식 씨는 매일 김밥값을 3,000원씩 냈습니다. 할머니가 거스름돈 천 원을 내밀면 "괜찮습니다, 김밥이 맛있어서 드리는 겁니다" 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도 나중에는 고개를 숙이며 천 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3년이 흘렀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대식 씨는 출근길에 김밥집에 들렀고, 할머니는 늘 같은 자리에서 김밥을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름도 묻지 않았지만, 어느새 서로의 하루를 확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겨울에는 할머니가 언 손을 호호 불며 김밥을 말았습니다. 대식 씨는 관리사무소 창고에서 쓰지 않는 작은 난로를 하나 가져다 가게 구석에 놓아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난로 앞에 손을 쬐며 "기사 양반 덕분에 올겨울은 손이 안 얼겠네" 하고 웃었습니다.
할머니는 가끔 김밥 봉지에 삶은 달걀 하나를 몰래 넣어 주곤 했습니다. "기사 양반은 단백질도 먹어야 해." 대식 씨는 그 달걀을 지하철 안에서 까 먹으며, 아내가 아침마다 챙겨 주던 달걀 프라이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던 지난달, 김밥집 셔터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은 할머니가 몸이 안 좋은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셔터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대식 씨는 출근길마다 닫힌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그사이 대식 씨는 다시 아침을 굶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김밥집에 들러 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김밥이 단순한 아침밥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빈자리가 생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열흘째 되던 날 아침, 셔터에 하얀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대식 씨는 다가가 그 종이를 읽었습니다.
[그동안 김밥집을 아껴 주신 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가 지난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천 원을 더 내고 가시던 버스 기사님, 어머니가 꼭 전해 달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게 옆 세탁소에 맡겨 두었습니다.]

대식 씨는 떨리는 다리로 옆 세탁소 문을 열었습니다. 세탁소 주인은 대식 씨를 보자마자 알아보고 서랍에서 누런 봉투 하나와 작은 보자기 꾸러미를 꺼내 주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가 두툼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세어 보니 칠백 장이 넘었습니다. 대식 씨가 3년 동안 더 낸 천 원을 할머니는 단 한 장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할머니의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기사 양반, 이 돈은 내가 받을 돈이 아니우. 마누라 먼저 보내고 혼자 굶고 다니는 거 내가 다 알았소. 그래서 천 원을 받아 두었다가 언젠가 돌려주려고 했지. 이걸로 몸에 좋은 거 사 먹고, 꼭 오래오래 사시우. 그리고 보자기 안에 든 건 내 김밥 비법이우. 이제 내가 없으니 직접 싸 먹어야 해.]

보자기를 풀자 김밥 말이 발과 함께 낡은 공책 한 권이 나왔습니다. 공책에는 밥 짓는 물의 양부터 단무지 고르는 법, 시금치 데치는 시간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기사 양반 입맛에 맞게 소금은 조금 적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대식 씨는 세탁소 앞 길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3년 동안 할머니를 돕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할머니가 혼자 남은 자신을 매일 아침 돌봐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달걀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내를 잃은 뒤 무너질 뻔한 자신을 붙잡아 주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세탁소 주인의 말로는 할머니가 지난여름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았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가게를 그만두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끝까지 셔터를 올렸다고 했습니다. "그 기사 양반 아침 굶을까 봐 못 쉰다"는 것이 할머니의 이유였습니다.
세탁소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서 그 봉투 꼭 전해 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어요. 기사 양반 오면 울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전하라고요."

그날 저녁, 대식 씨는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김밥 재료를 샀습니다. 할머니의 공책을 펼쳐 놓고 서툰 솜씨로 밥을 짓고 시금치를 데쳤습니다. 몇 번이나 터지고 찢어진 끝에 겨우 한 줄을 말았습니다. 모양은 엉성했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할머니의 김밥 맛이 입안에 퍼졌습니다.
대식 씨는 그 김밥을 사진으로 찍어 두 딸에게 보냈습니다. "아빠가 처음으로 김밥을 말았다." 큰딸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빠, 엄마 김밥이랑 똑같이 생겼네요. 주말에 내려갈게요. 같이 싸 먹어요."
그리고 대식 씨는 할머니가 남긴 봉투의 돈으로 동네 복지관에 매달 김밥 백 줄을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이 아침을 거르지 않도록, 할머니가 자신에게 해 준 것을 이제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기로 한 것입니다.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의 소설 제목 『우동 한 그릇』 속 우동집 주인은 가난한 세 모자에게 말없이 우동 반 덩이를 더 얹어 주었습니다. 큰 선행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 주는 작은 마음은 오래도록 사람을 살립니다.

우리는 내가 누군가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나를 돕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건네는 인사 한마디, 작은 친절 하나가 서로의 외로운 하루를 버티게 해 줍니다. 오늘 내가 자주 가는 가게 주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 보세요.
요즘 대식 씨는 주말 아침마다 직접 싼 김밥을 들고 불암산 둘레길을 오릅니다. 산 중턱 정자에 앉아 김밥 한 줄을 꺼내 먹으면, 단풍 든 능선 너머로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집니다. 대식 씨는 그 햇살 속에서 늘 할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립니다. "기사 양반,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우?"
출처 : '우동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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