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한국인의 1인당 명품 소비가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고물가 시대에도 명품을 사기 위해 '오픈런'이 일상인 한국. 팬데믹 이후 명품 시장의 큰손이 된 MZ세대의 명품 소비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명품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한국 경제의 변천사와 소비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한국인의 명품 소비는 사회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했다. DBR 363호에 실린 기사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한국인의 명품 사랑은 유별나다. 올해 초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2022년 한국인의 1인당 명품 소비가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총액으로 따지면 2022년 한국인은 무려 168억 달러(20조 원)어치 명품을 구매했다. 프라다는 2022년 중국 매출이 7% 이상 줄었지만 한국에서의 매출 호조로 손실을 대부분 만회했다고 한다.
어디 이뿐인가. 한국인의 명품 사랑은 감염병도 이겨냈다. 시장 조사 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명품 매출(125억420만 달러)은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125억1730만 달러)에 비해 거의 줄지 않았다. 몽클레르(Moncler)의 경우 2022년 한국 매출이 코로나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고, 카르티에(Cartier), 피아제(Piaget) 등을 소유한 리슈몽(Richemont)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매출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 증가한 거의 유일한 지역이었다.

위 그래프는 3대 명품으로 알려진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의 최근 한국 매출을 나타낸다. 먼저 루이뷔통은 2021년 한국에서 1조4681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 대비 40% 급증한 수치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에 7864억 원의 매출을 올린 것과 비교하면 2년 만에 2배로 증가했다. 2021년 샤넬은 1조2238억 원(전년 대비 32% 증가), 에르메스는 5275억 원(26% 증가)의 매출을 올렸다. 3사의 매출을 다 합치면 무려 3조2193억 원이나 된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왜 한국인은 유독 명품을 사랑할까. 과시욕이 강해서? 허영이 심해서? 한국인의 명품 사랑을 단순히 사치로 매도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명품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재화가 아니다. 즉, 명품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한 사회에선 명품이지만 다른 사회에선 명품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명품 소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 명품 시장,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성장
한국 명품 시장의 성장은 세계화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높은 관세 장벽을 통해 해외 물품의 수입을 엄격히 제한했다. 명품은커녕 해외 물건 자체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미제 땅콩버터조차 구하기 어렵던 시절이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의류 및 신발의 수입에 대한 관세가 대폭 완화되고 해외 브랜드들이 대거 한국에 진출했다. 1984년 루이뷔통이 처음으로 롯데면세점에 들어왔고, 1991년에는 한국 지사인 루이뷔통코리아가 출범했다.
억눌렸던 욕망이 봉인 해제되면서 마치 명품을 몰랐던 지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명품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1990년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이 개장한 것은 명품 소비의 분수령이 됐다. 갤러리아 명품관에 각종 해외 명품 브랜드 입점을 시작으로 압구정동 주변엔 해외 명품 브랜드들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차례로 들어섰다.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강남 부유층의 쇼핑 아지트가 됐고, 해외 명품을 즐기고 고급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오렌지족’의 성지로 떠올랐다.
한국의 명품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킨 또 하나의 촉매제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였다. 지금은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순수한 여행 목적의 출국에는 여권이 아예 발급되지 않았다. 출장, 유학, 취업 등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만 출국이 가능했다. 그러나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적으로 자유화되면서 바로 그해 출국자 수가 사상 처음 1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은 파리, 밀라노 등 패션 산업의 메카를 직접 방문하고 명품의 세계에 눈을 떴다.
소비자의 구매력에 따라 울고 웃는 명품 시장
그러나 무엇보다 명품이 잘 팔리려면 소비자의 구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급격히 증가한 호황기였다.
1980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870달러에 불과했으나 1994년 1만 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까지 1인당 국민총소득의 증가율은 매년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도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전년 대비 28%나 증가했다. 다시 말해, 19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사회의 명품 열풍은 욕망과 경제력의 협업이 이뤄낸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97년 말에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는 순식간에 명품 열풍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는 국가를 다시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절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국가의 채무를 대신 갚아주겠다며 집에 있던 금붙이를 모조리 국가에 헌납까지 했다. 개인의 소비 행위는 철저히 ‘애국’의 관점에서 판단됐고 당연히 과소비는 죄악시됐다. 아이러니하게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경기 부양과 소비 진작을 위해 카드 발행을 남발하면서 명품 시장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무분별한 카드 발행은 곧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해내며 이른바 카드 대란으로 이어졌다. 2000년 말 80만 명이던 신용카드 관련 신용불량자는 2002년 말 149만 명까지 증가했다. IMF 금융위기와 카드 대란을 겪으며 명품 소비의 대중화를 견인하던 중산층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면서 결과적으론 상류층의 구매력이 더욱 증대했다.
명품 시장이 잠시 조정 국면을 겪었지만 다시금 활성화될 수 있었던 건 누군가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비정한 속성을 학습하게 함으로써 욕망에 더욱 솔직해지게 만들었다. ‘존재’를 지켜주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걸 뼈저리게 학습한 가혹한 시절이었다.
과시적 소비는 인간의 당연한 욕망
이쯤 되면 한국인이 명품에 열광하게 된 것이 단지 허영으로 설명될 수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허영은 인류 보편의 감정이자 욕구이다. 한 사회의 명품 수요와 공급의 폭발을 허영에 기대어 설명한다면 왜 다른 사회와는 구별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명품에 대한 일반론적 설명은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말하는 ‘과시적 소비’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 급속한 산업화로 신흥 부호들이 등장하던 시기, 과시적 소비는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상위 계급의 징표로 작용했다. 이들에겐 물건값이 터무니없이 비쌀수록 계급을 드러내기에는 더 좋았다.

스스로를 서민들과 구별하고픈 상류층의 욕구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구별 짓기(distinction)’ 개념을 통해서도 잘 설명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적 취향은 자율적 의지에 따른 개인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계급 간 위상이 반영된 구조적 산물이다. 축구보다 골프를, 소주보다 와인을, 대중음악보다 클래식 음악을 선호하는 것은 자신을 상류층에 위치시키고 서민들과 구별하고픈 욕망을 반영한다.
과시적 소비 또는 구별 짓기의 욕망은 인간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어떤 사회에서는 이것을 도덕적으로 허영이라 낙인찍고, 어떤 사회에서는 성공의 징표로 정당화할 뿐이다. 한국은 오랜 세월 동안 전자에 해당했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문화적 맥락이 반영돼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명품 소비가 다른 나라와 구분되는 지점 중 하나로 과소비에 대한 과도한 윤리적 비판을 꼽는다.
명품 열풍의 사회적 현실
명품이 한 사회에서 열풍을 일으키기까지는 그 사회 특유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명품 열풍은 어떠한 사회적 현실을 담고 있을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인구구조의 변화다. 한국은 현재 심각한 저출산 문제에 직면해 있다. 2021년 기준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0.81명이다. 즉, 여성 1명이 평생에 걸쳐 낳는 아이의 수가 1명이 채 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본인을 위한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저출산 현상은 자녀 양육을 위한 지출이나 저축을 줄이는 대신 본인을 위한 소비를 증대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에 더해 청년층의 미혼 또는 비혼 비율이 증가하는 것도 명품 소비에 영향을 끼친다. 부양할 가족이 없다는 것은 본인을 위한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부모 집에 얹혀사는 독신이라면 본인만을 위한 가처분 소득은 더욱 늘어난다. 최근 한국의 명품 열풍을 이끄는 것이 MZ세대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1년 현대백화점의 전체 명품 매출 가운데 20~30대 고객이 차지하는 비중은 48.7%나 됐다. 명품은 더 이상 경제적 안정을 획득한 이후에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초년생이 월급을 탈탈 털어 구매하는 아이템이 됐다.

부동산값 폭등도 관련이 있다. 20대에 결혼해 아이 낳고 돈 모아 집 사는 것이 지금까지 보통 사람들의 인생 경로였다면 이제 청년들은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수억 내지 수십억 원이나 하는 집을 구매하는 것은 평생 불가능한 꿈이 됐고, 미래를 위한 저축이나 투자가 무의미해졌다. ‘티끌 모아 티끌’일 뿐인 인생이라면 지금을 즐기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 측면에서 MZ세대의 명품 소비는 어쩌면 미래에 대한 비관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명품 소비는 여전히 과시욕 충족의 기능이 있다. 다만, 명품을 단지 사치나 허영의 문제로 귀결시키면 국가마다 나타나는 명품 소비의 서로 다른 트렌드를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타인과 구별되고픈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지나치게 윤리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개인의 소비 행위에 대한 지나친 간섭일 수 있다. 명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그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역사적 경로가 달랐다면 명품 소비의 양상은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363호
필자 김수경
정리 인터비즈 방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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