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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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가라.”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기분이 처지거나 기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몸이 좋지 않을 때 등 그 이유와 상황은 다양합니다.
그럴 때는 얼마간 기분이 저기압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내 다시 회복되고는 합니다. 좋아하는 활동을 하거나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풀리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면서 말이죠. 어떤 분들은 그럴 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조금 나아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이 저기압인 것 같은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이를 기분부전장애(Disthymia)라고 명명합니다. 기분부전장애는 하루 중 대부분 우울감을 경험하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은 상태가 최소 2년 이상 지속될 때 진단합니다.
우울장애, 불안장애를 비롯한 다양한 정신장애를 진단하는 진단체계인 정신장애 진단통계편람 DSM-Ⅳ에서는 우울장애의 하위 항목 중 하나로 기분부전장애(Dysthymic Disorder)를 분류하였고, 최신 개정판인 DSM-Ⅴ에서는 DSM-Ⅳ의 만성 주요주울장애(Chronic Major Depressive Disorder)와 기분부전장애를 통합하여 지속성 우울장애(Persistent Depressive Disorder, 기분저하증(Dysthymia)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기분부전장애 또는 기분부전증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합니다.
기분부전장애는 식욕 부진이나 과식, 불면 또는 수면 과다, 에너지 저하 또는 피로감, 자존감 저하, 집중력 감소나 우유부단, 절망감과 같은 증상 중 두 가지 이상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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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증상의 양상이 주요우울장애에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지만 주요우울장애에 비해서는 경미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기에 기분부전장애를 경험하는 개인들은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우울하거나 예민한 성격처럼 성격적 특성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또, 우울감이 아동기나 청소년기부터 시작되어 삶의 전반 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많기에 우울한 기분을 삶의 동반자, 늘 함께하는 것이라고 인지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으로 인해 의학적인 도움을 받기보다는 본인 기분의 기본값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분부전장애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주요우울장애가 함께 나타나거나 불안장애와 같은 다른 증상이 함께 나타나기도 하며, 이런 증상들이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적절한 치료적 개입을 통해 도움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분부전장애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나 상실, 실직,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 트라우마 사건 경험, 고립되고 은둔된 생활 습관과 같은 환경적, 대인 관계적 요인과 함께 호르몬 불균형, 뇌의 감정 조절 담당 중추 이상 같은 유전적, 생물학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치료 역시 환경적, 관계적, 인지행동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심리상담 기반 치료와 호르몬 조절과 같은 생물학적 기전에 초점을 맞춘 약물치료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접근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두 가지를 모두 병행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할 때 가장 치료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상담 기반 치료
기분부전장애를 경험하는 개인들은 계속된 우울감과 기분 저하로 의욕 상실, 자기 확신 부족, 고독감 등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상담치료에서는 이런 개인들에게 자기 확신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지지적 치료와 함께 부정적이고 자동적인 사고를 합리적 사고로 대체하고 행동적 변화를 촉진하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를 통해 패배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와 행동을 수정합니다. 또한 대인관계 치료(Interpersonal Therapy)를 통해 대인관계 자원을 확장하고 대인관계 갈등, 사별, 삶의 시기마다 일어나는 중요한 전환 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2. 약물치료
우울증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프로작, 졸로프트와 같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s: SSRI) 계열의 약물이나 이펙사 등의 항우울제 등을 처방할 수 있습니다. 약물과 복용량에 따라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므로 개인의 신체적, 정신의학적 상태를 고려하여 처방이 이루어집니다.
누구에게나 흐린 날은 있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 행복과 불행은 자주 바뀌는 날씨처럼 오락가락하며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그러려니, 이럴 때도 있겠거니 할 때가 많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감정 소모처럼 느껴져서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지요. 이런 태도는 작은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늘 흐린 듯한 내 기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활력이 없는 내 모습을 ‘원래의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기쁜 일에도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에도 슬퍼하지 않으며 감정이 메말라버린 듯한 무미건조한 삶, 무력감과 불면증, 낮은 자존감이 습관처럼 익숙해진 삶 속에 자신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입니다.
혹시 기분이 흐린 날이 너무 자주, 오래 지속되고 있다면 그것을 삶의 일부, 원래 내 모습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전문가를 통해 도움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구름에 가려 늘 흐린 줄만 알았던 하늘이, 실은 선명하게 푸르른 하늘빛이었다는 걸 발견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살다 보면 흐린 날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따스한 햇살도 비출 수 있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서울역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희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