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파친코’ 정인지 “한국의 어머니상에 날 캐스팅한다고? 이거 사기 아닌가 했죠”

진향희 스타투데이 기자(happy@mk.co.kr) 2024. 10. 2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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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서 선자 엄마 양진 役
“내 나이대 한 여성으로 접근, 그래서 어렵지 않았죠”
“이민호, 조지클루니 같았다”
‘파친코’에서 양진 역을 연기한 정인지. 사진 ㅣ사람 엔터테인먼트
애플TV+ ‘파친코’는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강인한 어머니 선자의 시선을 통해 사랑과 생존에 대한 광범위한 이야기를 4대에 걸친 연대기로 풀어낸 작품이다. 총 8부작으로 지난 11일 애플TV+에서 최종회가 공개됐다.

시즌1이 1910년대를 배경으로 고국을 떠나와 일본에서 새 삶을 꾸리는 주인공 선자와 한국 이민자들의 모습을 담았다면, 시즌2에선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한 1945년 오사카를 배경으로 선자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선택까지 감행하며 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1000억원에 이르는 제작비와 거대한 스케일 만큼 화제를 모은 것은 시대를 넘나드는 배우들의 호연이었다. 그 중에서도 선자(전유나, 김민하, 윤여정 분)의 어머니 ‘양진’ 역을 연기한 배우 정은지(39)는 진흙 속에서 발견해낸 진주 같았다.

딸로 호흡을 맞춘 김민하와 11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서른 아홉의 여배우. 그의 섬세하면서도 깊이있는 열연은 국내외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끌어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고, 닥친 시련과 난관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조선의 여성상을 사실적으로 구현해낸 그는 뜻밖에도 “어머니 연기가 그리 어렵진 않았다”고 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소속사 사무실에서 정인지를 만났다. 다음은 정인지와 일문일답.

정인지의 묵직한 열연은 국내외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사진 ㅣ사람 엔터테인먼트
전 회차가 공개됐는데…소감은

찾아오는 과정이 좀 어려울 순 있어도 그런 만큼 깊게 보시더라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나 놓친 부분도 디테일하게 보셔셔 놀랐어요. 역사적인 사실이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그 틈에서 살아낸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더더욱 그런 부분에서 실감하는 것 같았어요.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기억나는 반응이 있다면

‘한국 배우들 연기 잘하네’란 말이 기분 좋았어요. ‘파친코1’ 프리미어를 하는데 파티장에서 정말 많은 관계자들을 만났죠. 릴리즈 되기 전인데도, 극 속의 한복을 입고 있지 않았는 데도 좋아해주셨고 그레이트(great) 한 칭찬도 많이 해주셨어요. ‘한국 배우들 연기 잘 한다’는 그 말, 이번에 이민호 배우를 보면서도 느꼈어요. 조지 클루니 같았죠.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80년대생인데 어머니에 노역 연기까지 어렵진 않았나

사실 어렵진 않았어요. 저희 엄마나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훨씬 더 가깝게 오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미래인간이라서 이 고난을 위에서 쳐다보니까 얼마나 힘들까 느낌이지만, 그 당시에 그 순간을 살아내는 캐릭터들은 하루하루 사는 게 급급했을 거란 말이죠. 지나고나서 통으로 봤더니 저 캐릭터가 너무 안됐고 마음이 쓰이는데, 연기하면서는 정말 급급했어요. 닥쳐내는 것들이. 우리네 어른들이 다 그렇게 그 틈을 메워가면서 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어렵지 않았다는 게 뜻밖의 답이다

아마 멀게 보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접근 자체를 내 나이대 여성이라고 봤어요. 닥쳐진 상황은 굉장히 어려웠지만 그 나이대 한 여성으로 보니까 멋있더라고요. 그 마음으로 접근했던 것 같아요.

캐릭터를 위해 준비한 것이나 노력이 있다면

대본상에 지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높았어요.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생각하는 순간을 훨씬 더 포착할 수 있게끔, 그 생각을 조금 더 구체화할 수 있게끔. 그런 대본들이 아쩌면 번역을 여러번 거치면서 말이 늘어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게 더 좋은 효과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 사고를 따라가는 과정을 잘 잡아주셨고. 매체는 확실히 편집과 이런 비율이 훨씬 더 크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잘 보여진 게 아닌가.

1000억 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애플TV+ ‘파친코’. 사진 ㅣ애플TV+
이런 대작에 캐스팅 된 과정이 궁금하다

‘난설’이란 뮤지컬 공연이 있었는데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를 한 저를 보고 연락을 주셨어요. 전에도 여러 번 제 공연을 봐주신 분이더라고요. 처음엔 이게(작품이) 얼마나 큰지, 가늠하기가 어려웠거든요. ‘100만원 줄게 하면 떡볶이 몇 접시줄게’ 하는 갭이랄까. 제작비도 실감하기 어려운 액수였고, 프로덕션 크기도 잘 몰랐고요. 그래서 사실은 안 한다고 했었어요. 두번째 오디션도 봤지만 약속된 공연이 있어서, 캐나다 촬영까진 가서 못할 거 같다고 말씀 드렸죠. 그런데 그분이 직접 (선약이 된) 그 공연 제작사에 전화를 해주셔서,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었는데 그걸 파기해주셨어요. 그래서 ‘파친코’ 드라마를 할 수 있었어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랬나봐요. 제가 생각했을 땐 제가 한국의 어머니상은 아니라 생각했어요. 제 얼굴이나 목소리톤, 선도 너무 굵은 거 같고, 한국의 어머니상 하면 어깨도 작을 것 같은 그런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마지막까지 캐스팅되고나서도 ‘한국의 어머니상에 날 캐스팅한다고? 이거 사기 아니야?’ 생각도 했고 의문스럽기도 했어요.(웃음)

‘어머니’란 어떤 의미로 와 닿았나. 이 작품을 찍으면서 달라진 생각은

여태까지 어머니는 어머니였어요. 성역이 역할이 됐을 때 그게 무섭더라구요. 그건 역할인 건데 하나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거죠. 그런데 ‘파친코’를 찍으면서는 하나의 여성으로 만나졌어요. 이 여성이 이때 아무 것도 몰랐을 거고 열 아홉에 세번째 아이를 출산하게 된 그 여성의 관점으로 만났달까. 어머니로 접근하면 너무 멀고 딱딱 정해진 고정관념 속에 무언가 맞춰나가야 할 것 같은데.

다른 배우들과 현장에서 호흡은 어땠나

정말 좋았어요. 마치 공연 만드는 것처럼 드라마를 같이 만들어나갔어요. ‘파친코’ 프로덕션만의 분위기이기도 했고, 시즌2 같은 경우엔 배우들이 3명 이상 나오는 신들이 많았어요. 특히 양진과 경희와 선자 이 세명의 여자가 함께 있는 장면, 가족들 안에 있는 장면 등을 연극동선 짜듯이 우리끼리 자유롭게 얘길 나눴어요. 감독님도 배우들이 그 동선 안에서 믿고 갈 수 있다 판단한 것 같아요. 카메라 뒤에서도 같이 시간을 정말 많이 보내고. 여행도 같이 가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민호 배우와도 그렇고 만날 일이 별로 없는 데도 연극 작업하는 것처럼 만나고 진행했던 것 같아요.

‘파친코2’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손자 노아(박재준)를 보내는 장면인데요. 되게 인상 깊었어요. 물론 선자와 양진이 만나는 장면은 너무 임팩트가 크기도 하고 책 안에서도 키(key)가 되는 장면이기도 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노아를 보내는 장면이 이렇게까지 더 깊을 지 몰랐어요. 저는 손자도 없고 아들도 없는데 그런 마음이 들 줄은. 그게 묘한 감정이기도 하고. 사실 양진에겐 전부잖아요. 남편도 없고 부모도 없고 하숙집에서 모든 걸 잃고 딸까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만나서 하나의 가족을 이뤄나가다 보니까.

‘파친코2’에선 대부분의 양진의 대사가 애드립이에요. ‘할머니 밥 먹고 싶으면 오라’는 그 말도 대본에 없어요. 딸과 부딪히는 장면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애드립이었는데, 정말 그 말이 나오더라고요.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았어요.

‘파친코2’ 한 장면. 사진 ㅣ애플TV+
시즌1에서 ‘눈물의 쌀밥’ 신이 명장면이었다면, 시즌2에선 딸과 상봉 장면을 베스트로 꼽는 시청자가 많다. 촬영장 분위기는 어땠나

뭐랄까. 한국 사람이 바라보는 엄마와 딸의 만남의 순간, 여기서 문화적 차이가 느껴지긴 했어요. 뭔가 이 장면을 길게 딥하게 다양하게 가져갈 것 같고 정말 담백하게 찍고넘어갔어요. 그게 파친코의 매력이기도 해요. 책도 약간 그런 느낌이잖아요. 길게 늘어질 것 같은데 왠지 신파가 될 거 같은데 훅훅 하고 넘어가는.

윤여정 배우와 한 작품에서 연기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겹쳐지는 장면이 없어서 실제론 그 분이 연기하는 장면을 직접 못 봤지만… 촬영장에서 뵙고 완성된 작품을 봤을 때, 저는 강함을 연기하는 것보다 여림을 연기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여림을 연기할 때 놀라운, 마음의 울림이 온다고 할까. 실제로 뵀을 땐 카리스마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걸어가는 데도 그 아우라라는 게 있잖아요. 그 순간의 여림을 연기할 때 놀랍더라고요.

‘파친코’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결국 무엇이라 느꼈나

사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돼요. 우린 너무 많은 걸 보면서 가져가야 된다 쫒김을 받고 사는 것 같아요. 마음껏 울어도 되고 재미가 없다면 그냥 그렇게 느껴도 좋고요. 이걸 보고 뭔가를 느끼지 않아도 좋아요. 찾아서 보시는 거라 결국엔 읽는 자, 바라보는 자의 몫이 큰 것 같아요.

‘파친코 2’는 지난 11일 마지막 화가 공개, 현재 애플 TV에 전 시즌이 공개됐다. 사진 ㅣ사람 엔터테인먼트
한때 연기생활의 어려움으로 사무직으로 전향하기도 했다고

26살 때, 페이를 못 받아서 몇년 간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어요. 최저 봉급을 받고요. 조용히 시키는 것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서른에 다시 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 제가 (연기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버린거죠. 짝사랑하는 것처럼 연기할 땐 내가 ‘을’이구나,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을 여러 번 봤을 것 같다

사실 저는 좀 많이 봤어요. 근데, 제가 연기한 장면은 건너뛰면서요. 못 보겠더라고요. 낯설기도 하고 ‘내가 왜 그랬지’란 생각도 들고. 영상 매체는 감독님이나 다른 분들이 (검열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먼저 저에 대해 너무 검열을 해버리니까요.

자신만의 연기 철학이 있다면

어떤 역할을 만나더라도 ‘사람 냄새나게’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연기 철학? 이 질문은 평생 고민해보겠습니다. 그건 있어요. ‘이 대사를 내뱉을 때 부끄럽지는 말자’. 그게 어떤 역할이라 해도. 지금은 그래요. 지금 현재 이 업에서 연기하는 분들이 참으로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한분을 칭하기 어려워요. 어떻게 보면 미련하기도 하고,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끈기 있기도 하고.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워요.

차기작이 정해졌을 것 같다. 여러 방면에서 러브콜을 받을 것 같은데

정해졌는데 아직(오픈 단계는). 제 모토가 ‘더 가고 싶을 때 멈추자’에요. 이 일을 어렸을 때부터 해오다 보니 다 때가 있고 순리대로 하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조금 더 가고 싶을 때, 조금 더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 때 멈추자, 내 속도를 제어하자.(싶어요) 내가 1000cc인데 2000cc의 차가 될 수 없잖아요. 갑자기 아우토반이 나타났다고 내가 경차인데 달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내 속도대로 달리다 보면 어딘가엔 가 있겠죠.

앞으로 행보를 그려본다면

제 삶에 부끄럽지 않은 성장을 하고 싶어요. 사람으로서도. 직업적으로는 얼만큼 성공하느냐 그 기준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정인지로서 일상을 잘 유지하고 배우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잘 해내는 게. 물론 그런 건 있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할 수 있으면 감사한 일이잖아요. 다시 먹고사는 문제로 그만두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제 작은 바람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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