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도 즐기는 제주도 최초의 해수욕장, '고등학생'이 만들었다
"어른들이 아무도 안 해줘서 수능 문제 풀고 있어야 할 저희가 직접 만들었어요."
제주 표선고등학교의 인권 동아리 '이끼' 소속 학생들은 지난 7월 말 인근 표선 해수욕장에 교통 약자들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장비들을 직접 구매해 제주도 최초로 도입했다.
한 사회공헌 지원사업에 선정돼 직접 마련한 상금으로 고가의 수중휠체어와 모래사장에서도 일반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전용 매트를 구매한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주축이 된 동아리 소속 학생들이 어쩌다 직접 예산까지 마련해 ‘무장애 해수욕장' 만들기에 나섰는지, BBC가 이 동아리의 주축인 엄주현, 최지슬, 이예림 학생을 만나봤다.
장애인은 '갈 수 없는' 바다
2022년 교내 이동권 문제에 주목해 만들어진 이끼는 학교 안에서부터 점차 인근 지역으로 관심 범위를 넓혔다. 3학년 부원 최지슬 양은 "저희 지역에서 표선 해수욕장이 가장 유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곳의 접근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해수욕장에 교통 약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현실에 많이 놀랐어요."
학생들은 매일같이 지나던 해수욕장의 교통 약자 접근성이 매우 낮음을 발견했다. 백사장과 통하는 길은 가파른 경사로나 높은 계단이 전부였고, 주차장에는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도 없었다. 해수욕장 근처에 장애인용 화장실이 있기는 했지만 최 양은 "그 앞에도 턱이 있어 많이 놀랐다"고 전했다.
또 다른 3학년 부원 이예림 양 역시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은 매우 높아서 어린이들도 혼자 다니기에 위험할 정도"라고 말했다.
부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다가 보령의 대천 해수욕장 같은 곳에서는 이미 무장애 해수욕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장애 해수욕장이란 휠체어나 유모차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별도 시설과 교통 약자들을 위한 화장실 및 샤워실을 갖춘 해수욕장을 말한다.
현재 충남 보령의 대천 해수욕장과 경남 거제의 와현 해수욕장 등은 수중휠체어와 무장애 매트, 장애인 전용 샤워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 이런 사례가 드문 탓에 무장애 해수욕장은 여전히 생소하다.
현 동아리 부장인 엄주현 양은 "작년에 저희를 도와주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제주에 한 대밖에 없는 대여용 수중휠체어를 빌려오셔서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장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면서 "이런 게 있어서 신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왜 아직도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의아했다"고 전했다.
무장애 해수욕장의 존재를 알게 된 학생들은 조사 활동이나 캠페인을 넘어 직접 해수욕장을 바꿔보기로 뜻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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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만원 넘는 장비를 직접 도입하기까지
"수중휠체어는 한 대에 450만원, 매트는 10m에 250만원이라고 안내를 해주시더라고요.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어요."
엄 양은 국내에 두 곳 뿐인 관련 제조 업체에 직접 전화해 가격을 문의했다. 문제는 장비 가격만이 아니었다.
"장비 자체도 비싼데, 이 장비들을 설치하고 관리하려면 추가로 인력이 필요하고, 이렇게 인력과 장비를 도입하려면 관련 조례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부원들은 지자체에 문의했지만 관련 근거가 없으면 설치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엄 양은 학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런 과정을 통하면 변화를 만들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학교에 주차장과 등굣길이 겹치는 구간에 횡단보도를 하나 설치해달라고 제안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결정되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리더라고요. 막상 횡단보도를 그리는 데는 2주도 안 걸렸는데 말이죠."
엄 양은 "학교가 필요로 하는 근거들을 직접 마련했어야 됐다"며, "관련 사례 조사, 학생들의 의견 수렴, 시공 업체와의 협의 등을 모두 동아리 부원들이 직접 해서 학교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모두가 좋자고 하는 일인데, 근거를 만드는 과정이 이렇게까지 필요 이상으로 길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부원들은 이번에는 오랜 시간을 설득하고 기다리는 대신 직접 장비를 구매해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활동비를 2000만원까지 지원해주는 사회공헌 프로젝트 지원사업을 알게 됐다. 엄 양과 부원들은 한 기업이 후원하는 이 지역사회 혁신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결국 선정됐다.
여기서 받은 지원금으로 수중휠체어 2대와 무장애 매트 40m를 구입해 표선 해수욕장에 배치했다.
지난 7월 23일 이렇게 도입된 수중휠체어와 매트를 처음으로 시범 운영했으며, 현재는 표선면사무소나 서귀포시 동부사회복지관에 사전 문의하면 수중휠체어를 대여해주는 식으로 운영 중이다.
'어릴 때 맡던 감태 냄새를 이번에 맡았어요'
표선 인근에서 평생 살아온 주민 송윤호씨(76)는 시범 운영 때 수중휠체어를 타고 바다에 들어갔다. 지병으로 다리를 절단한 지 10년 만이다.
"어릴 때 바다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감태가 떠오르면서 그 냄새가 확 올라왔어요. 이번에 바닷물에 들어갔는데 그때 그 감태 냄새가 나더라고요."
다리를 절단한 이후에는 "위험하기도 하고 남들 보기도 뭐한 것 같아 엄두를 못 냈다"던 송 씨는 10년 만에 바다에 들어간 감회를 전했다.
이어 "장애인뿐 아니라 노약자들도 물에 혼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면서 "이런 휠체어가 더 도입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중휠체어를 밀고 함께 바다에 들어갔던 최 양은 "생각보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어 놀랐다"며 "휠체어 바퀴가 모래에 빠지지도 않고, 타는 사람이 손을 저어 안정적으로 방향 전환도 할 수 있었다"며 휠체어를 몰아본 소감을 전했다.
아직은 갈 길이 먼 '모두가 바라던 바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수중휠체어와 무장애 매트가 도입되기는 했지만, 아직 표선의 온전한 무장애 해수욕장 운영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이끼와 함께하는 사회복지사 김민석 씨는 "무장애 매트의 경우 올해는 사실상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를 설치하고 관리할 전담 인력이 없어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끼는 현재 제주도 조례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최 양은 "제주에는 '교통 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 조례'가 있지만, 여기에 '무장애 관광'이 명시되지 않아 무장애 관광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하기가 어렵다"며, "이 조례에 '무장애 관광'을 명시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현재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남도, 대구광역시, 여수시 등에 ‘무장애 관광'과 관련된 조례가 제정돼 있다. 해당 지자체들은 이를 근거로 유명 관광지의 교통약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사업들을 진행중이다.
김 씨는 "이미 학생들 주도로 1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도 마쳤다"며, "설문 조사 결과, 각종 사례 등을 분석해 제주도의회에 조례 개정 보고서를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0만원은 저희한테는 너무나 큰 돈이지만, 예산을 집행하는 분들에게 이 돈이 그렇게 큰 돈일까요?"
엄 양은 이번 과정을 거치며 왜 진작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고 전했다.
"학생 몇 명, 도와주는 선생님 한두 분이 함께 한 일이잖아요. 더 영향력 있는 어른들이 했으면 훨씬 쉽고 빠르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렇지 않았을지 의문이 들고 답답했어요."
그러면서 "저희가 이렇게 피땀 흘려가며 사례를 만든 만큼, 이런 사례를 참고해 어른들이 더 많은 것들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학생들은 이어 앞으로 표선 해수욕장은 물론 제주도 전체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 양은 "표선에 오는 버스 중에 저상버스는 아예 없고, 장애인용 콜택시도 이 지역에 2대 뿐"이라며 "제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인만큼 교통 약자를 위한 여건이 많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선활동처럼 일시적인 것 말고, 똑같이 즐길 수 있도록 모두에게 똑같은 권리를 보장해주는 이런 활동이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다"며 “앞으로 이렇게 권리를 보장하는 활동을 더 많이 하고 싶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