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음력 4월 19일 새벽.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구름까지 닿을 듯 단단했던 성벽이 종잇장처럼 무참히 찢겨 나갔습니다. 무려 일천칠백 근의 어마어마한 화약이 터진 참혹한 현장. 이곳은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아내는 국경의 최전선이 아니었습니다. 국왕의 부름을 받은 조선의 관군이, 다름 아닌 같은 조선의 백성들을 향해 불을 뿜은 참극의 무대였습니다.
석 달 전, 여덟 개 고을을 단숨에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성난 백성들. 그리고 그들의 맨 앞줄에는 턱이 짧고 오른쪽 눈 위에 작은 사마귀가 있던 낯선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대체 무엇이 붓과 괭이를 잡아야 할 평범한 백성들의 손에 시퍼런 칼을 쥐여 주었으며, 국왕의 군대는 왜 굳게 닫힌 성문을 열기 위해 자국민을 향해 엄청난 폭약을 터뜨려야만 했을까요? 피비린내 나는 그날의 정주성, 그 안에는 역사책이 차마 다 말하지 못한 기막힌 진실과 처절한 미스터리가 숨어 있습니다.

거대한 폭발의 씨앗, 300년의 차별과 눈먼 권력
흔히 북쪽 지방인 평안도 지역은 농사가 잘되지 않아 가난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상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돈이 넘쳐나니 자연스럽게 재정도 넉넉했습니다.
문제는 이 넉넉함이 훗날 끔찍한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조정은 오랜 세월 평안도 출신 사람들을 오랑캐와 가깝다며 무시하고,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높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철저히 소외된 이 지역 백성들은 출세할 길이 막힌 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살림이 궁핍해지자, 중앙의 썩은 권력자들은 부유한 평안도의 돈을 강제로 끌어다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초반은 소수의 가문이 나라의 권력을 쥐고 흔들던 '세도 정치(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소수의 가문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독점한 부패한 정치)'의 시대였습니다. 벼슬자리는 돈을 주고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수천 냥의 빚을 내어 지방 관리가 된 자들은 자신의 본전을 뽑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무자비하게 쥐어짰습니다. 억울한 세금 폭탄은 가난한 농민은 물론, 큰돈을 벌어들인 평안도의 굵직한 상인들에게까지 공평하게 떨어졌습니다. 차별은 일상이었고, 수탈은 끝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속 분노는 이미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와 같았습니다.

평민 출신의 지략가, 150센티미터 사내가 백성의 마음을 훔치다
이 거대한 분노에 불을 붙인 자가 바로 홍경래입니다. 교과서 등에서는 그를 몰락한 양반으로 소개하기도 하지만, 여러 역사적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는 평민이었을 가능성이 몹시 큽니다. 그의 부인을 평민 계층의 여성을 부를 때 쓰는 '소사'라고 칭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의 외모는 볼품없었다고 전해집니다. 키는 다섯 자(약 150센티미터 전후)에 불과했고, 짧은 턱에 오른쪽 눈 위에는 사마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그 누구보다 비상했습니다. 병법서(군대를 지휘하고 싸우는 방법을 적은 책)와 풍수지리, 그리고 예언서인 정감록을 깊이 연구한 그는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홍경래는 오랜 시간 전국을 떠돌며 치밀하게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군대의 자금을 댈 큰 상인들, 무력을 갖춘 장사들, 부패한 관리들에게 앙심을 품은 하급 일꾼들, 그리고 굶주린 농민들까지 모든 계층을 하나로 묶어냈습니다. "어린 임금 뒤에 숨은 권세가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라는 그의 외침은 백성들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가장 통쾌한 한마디였습니다.

치명적인 오판, 그리고 100일간의 핏빛 항전
거침없이 여덟 고을을 무너뜨리며 평양성을 향해 나아가던 봉기군은, 그러나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송림이라는 곳에서 펼쳐진 관군과의 첫 전면전에서 대패한 것입니다. 어느 지역을 먼저 공격할 것인가를 두고 내부에서 심각한 다툼이 일어났고,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이 기습을 가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홍경래와 백성들은 정주성으로 숨어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무려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끔찍한 굶주림 속에서도 성을 지켜냈습니다. 관군이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오려 하자, 백성들은 커다란 빈 항아리에 머리를 집어넣고 땅속에서 울리는 괭이질 소리를 잡아내며 치열하게 방어했습니다.
하지만 조정의 끝없는 진압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812년 4월, 관군은 성벽 아래에 무려 1,700근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화약을 터뜨려 성벽을 박살 냈습니다. 성은 함락되었고, 지휘관이었던 홍경래는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끔찍한 피의 잔치였습니다. 붙잡힌 백성들 중 무려 1,900여 명의 목이 달아났습니다.
이때 정주성이 함락되기 전 관군에게 덜미를 잡혀 두려움에 떨며 항복을 선언했던 늙은 관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익순'. 훗날 과거 시험장에서 자신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의 비겁한 항복을 매섭게 꾸짖는 글을 썼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 평생을 부끄러움 속에 큰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살았던 조선 최고의 천재 시인, '방랑 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의 슬픈 전설은 바로 이 피비린내 나는 홍경래의 난에서 싹튼 기막힌 역사의 나비효과였습니다.

눌리고 짓밟힌 백성의 분노는 단단한 성벽을 무너뜨리는 1,700근의 화약보다 훨씬 더 뜨겁고 매섭게 역사에 타오릅니다.
글/기획 : 역사 만화 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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