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이 타결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소식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숫자다. 매각대금 없는 구단 승계, 약 20억 원 규모 배구발전기금의 대폭 삭감 검토. SOOP의 AI페퍼스 인수는 단순한 스포츠단 인수가 아니라, 한국배구연맹(KOVO)이 7구단 체제를 지키기 위해 설계한 구조적 타협의 결과물이다.

페퍼저축은행의 구단 운영 한계는 갑자기 찾아온 게 아니다. 최근 3년간 약 2600억 원의 누적 손실을 기록한 모기업이 연간 수십억 원 규모의 배구단 운영비를 감당하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저축은행 업황 전반이 악화된 상황에서 배구단은 절감 1순위 항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단이 흔들리자 리그가 먼저 움직였다. KOVO는 신규 인수자의 가장 큰 진입 장벽이었던 배구발전기금 약 20억 원을 대폭 삭감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연맹이 직접 비용 구조를 조정해 잠재 인수자의 부담을 낮춘 것이다. 이 결정이 협상의 분기점이 됐다는 게 배구계의 분석이다.

SOOP이 인수 후보로 부상한 배경에는 사업 구조와의 접점이 있다. 구 아프리카TV에서 출발한 SOOP은 e스포츠 구단 운영과 스포츠 중계 사업을 이미 병행하고 있다. V리그 중계 경험도 있다. 여자배구는 국내 스포츠 콘텐츠 중 팬층이 두텁고 라이브 시청 반응이 강한 종목이다. 플랫폼 기업이 자사 스트리밍 인프라와 결합할 콘텐츠를 찾는다면, 여자배구는 후보군 상위권에 놓일 수 있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서 여자배구의 인기가 높다는 점은 글로벌 콘텐츠 사업과의 연결 가능성을 열어두는 변수다.
협상 타결 임박 보도에도 불구하고 핵심 조건 하나가 아직 열려 있다. 연고지다.
광주광역시와 페퍼저축은행 배구단의 연고 계약은 지난 12일 만료됐다. SOOP 본사는 성남에 있다. 두 선택지는 각각 다른 계산을 요구한다.

광주 연고를 유지하면 체육관 사용 혜택, 구단 명칭 사용권, 지역 기업 스폰서십 등 시 차원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광주는 호남권 유일의 프로배구팀이라는 상징성을 내세워 SOOP 측에 조건을 제안할 위치에 있다. 반면 성남으로 이전하면 선수단 이동 거리가 단축되고 본사와의 운영 통합이 수월해진다. 구단 운영 효율 측면에서의 이점이다.
연고지 결정은 단순한 행정 문제가 아니다. 광주 팬층이 형성된 규모, 체육관 계약 조건, 지자체 지원의 구체적 수준이 모두 변수로 작용한다. 이 조건들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SOOP이 어떤 방향을 선택할지 외부에서 단정하기 어렵다.
AI페퍼스 사태를 한 구단의 모기업 교체로만 읽으면 본질을 놓친다. 핵심은 여자배구 7구단 체제의 유지 가능성이다.
국내 여자프로배구는 흥국생명, 현대건설, GS칼텍스, IBK기업은행, 한국도로공사, 정관장, 그리고 AI페퍼스로 구성된 7구단 체제다. 이 중 AI페퍼스는 2021년 리그 확장 과정에서 광주 지역 연고를 조건으로 신설된 구단이다. 창단 첫 시즌부터 최하위를 기록하며 전력 격차를 드러냈고, 이후에도 상위권 도약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리그는 7구단 체제를 유지해왔다.

만약 이번 인수가 무산될 경우 시나리오는 두 가지로 수렴된다. 추가 인수자 탐색, 또는 팀 해체다. 해체가 현실화되면 여자배구는 6구단 체제로 후퇴한다. 이는 리그 경기 수 감소, 선수 수급 구조 변화, 광주 지역 스포츠 인프라 공백으로 이어진다.
KOVO가 배구발전기금 삭감이라는 이례적인 결정을 검토한 배경도 여기 있다. 연맹 입장에서는 7구단 체제를 지키는 비용이 기금 삭감의 손실보다 크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협상이 마무리 단계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최종 계약 체결 전까지는 변수가 남아 있다. 연고지 확정, KOVO와의 중계권 논의 결과, 세부 인수 조건이 모두 공식 발표를 통해 확인돼야 한다.

SOOP이 AI페퍼스를 품는다면, 그 다음 질문은 구단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다. 플랫폼 기업이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방식은 기존 금융·제조 기업의 모델과 다를 수 있다. 중계 연계, 팬 커뮤니티 플랫폼과의 통합, 콘텐츠 수익화 구조 등이 새로운 운영 모델의 축이 될 가능성이 있다.
연고지 결정과 공식 발표. 두 가지가 나오면 이 인수의 실제 윤곽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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