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④ 거절했는데 강연이 확정됐다

얼마 후 답장이 왔다.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확정된 강연 시간은 내가 분명히 어렵다고 말했던 그 시간이었다. 행사 계획서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강연료였다.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25%가량 높게 적혀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수락하지 않은 시간에, 내 이름이 들어간 행사 계획서가 만들어졌고, 강연료는 내가 말한 것보다 올라가 있었다. 강연료가 올라갔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시 상세하게 메일을 보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고, 그 시간에는 선약이 있어서 강연이 불가능하다고, 이전 메일에서도 그렇게 말씀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다시 답장이 왔다. 또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 또 행사 계획서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시간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한 그 시간. 강연료는 처음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50%가량 높아져 있었다.
기괴했다. 솔직히 잠깐 장난스러운 호기심도 생겼다. 여기서 한 번 더 같은 내용으로 거절 메일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강연료가 100% 올라서 올까? 거절할수록 몸값이 오르는 이상한 경매가 시작되는 것일까? 그런 실험은 하지 않았다.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간의 이메일 소통 내역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행사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지금 상황을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분은 몹시 당황한 듯했다. 이메일 소통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설명은 이랬다. 동명이인 교수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설령 동명이인 교수가 있다고 해도, 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시간에 왜 내 이름이 들어갔는지, 왜 강연료가 두 번이나 달라졌는지, 왜 같은 수락 감사 메일이 반복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AI와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교수 중에 김상균이 또 있다고?
아이러니한 것은, 그 협회가 내게 요청한 강연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이메일과 통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무질서로 가득 찼다.
나는 이 일이 반드시 AI 때문에 벌어졌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사람의 착오였을 수도 있다. 내부 전달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인이 무엇이냐보다, 이런 일이 앞으로 점점 더 자주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AI 시대의 무서움은 AI가 틀린 답을 낸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틀린 답이 아주 그럴듯한 문장과 공식 문서의 모양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전의 실수는 대체로 티가 났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문장은 매끄럽고, 형식은 완성되어 있고, 첨부 파일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 안의 사실관계가 틀려 있다. 더 곤란한 것은, 그 오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무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협회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유명한 기관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번 일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마주할 미래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인공지능 시대의 진짜 위험은 기계가 인간처럼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기계 뒤에 숨는 데 있다.
새로운 질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오래된 질서부터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사람 사이 신뢰의 원천은 무엇인지부터 말이다. 그 단순한 질서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AI를 붙여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그저 더 빠르고, 더 공손하고, 더 그럴듯하게 무질서해질 뿐이다.
김상균 경희대 경영대학원 AI비즈니스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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