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사람, 나이 많다고 괄시”…행정편의주의에 뿔난 어르신들

고령층 “나이 같으면 신체능력·운전실력 같나…행정편의 위한 획일적 기준 반대”
[사진=AI이미지/MS BING]

정부가 65세 이상 노인들을 상대로 ‘조건부 운전면허’를 발급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고령층 운전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규제 기준을 단지 숫자에 불과한 ‘나이’로 설정한 것에 대해 부당하다는 지적이 많다. 개개인의 신체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행정 편의만을 위해 설정한 기준이라며 신체검사 등 별도의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65세 이상 조건부 면허발급에 뿔난 어르신들 “공무원 편하자고 노인 전부 환자 만드나”

국토교통부와 경찰청이 지난 20일 발표한 ‘교통사고 사망자 감소 대책’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고령자의 안전한 운행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고령자 조건부 면허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조건에는 65세 이상 운전자에게 야간운전 금지, 고속도로 운전 금지, 속도제한 등을 조건으로 면허를 발급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 건수를 줄이겠다는 취지다. 2022년 기준 65세 이상 운전자가 가해자인 교통사고는 3만4652건으로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체 교통사고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7.6%에 달했다. 현재 정부는 고령자 운전면허증 반납 제도를 운영 중이지만 반납률이 2% 안팎으로 저조해 유명무실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 [그래픽=김상언] ⓒ르데스크

고령 운전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규제 기준을 신체 나이가 아닌 행정상 나이로 설정한 것부터 고령 운전자 보호라는 제도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더욱이 제도 도입의 이유로 내세운 고령자 운전사고 증가 역시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에 기인한 결과라며 문제의 접근 방식 자체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김기윤 씨(68·남)는 “요새 70세 이하는 어디 가서 노인 취급도 못 받는데 야간 운전이나 고속도로 운전 금지가 말이 되느냐”라며 “당장 나만해도 어디하나 아픈데 없고 심지어 헌혈도 하는데 단지 일정 나이가 넘었다고 전부 환자 취급하는 건 공무원들 편하자고 만든 기준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성토했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양원철 씨(70·남)는 “단지 사고 건수가 많다고 해당 나이 대에 있는 사람을 전부 문제 있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게 너무 기분 나쁘다”며 “그런 논리는 국가대표 운동선수와 동년배인 청년들은 전부 그 정도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 [그래픽=김상언] ⓒ르데스크

서울 중랑구에 거주하는 주강훈 씨(67·남·가명)는 “고령자 교통사고가 늘어난 것을 고령자의 신체능력이 떨어져 운전에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는데 문제의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됐다”며 “고령화 때문에 갈수록 고령 인구가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고령 운전자가 늘어났다는 상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 없이 무조건 나이로 딱 잘라서 기준 연령 이상의 운전자는 위험하다고 접근하는 논리는 행정편의주의적 사고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고령자 사고율, 고령 인구 증가율 보다 완만…“개인 별 신체나이 고려한 세밀한 접근 필요”

실제로 고령 인구가 늘면서 고령 운전면허 보유 인구수 또한 꾸준히 늘고 있다. 2019년 333만7165명에서 지난해 474만7426명으로 무려 140만명 가량 급증했다. 증가율만 놓고 보면 고령 운전자 사고 건수의 증가율에 비해 오히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고령운전자 사고 증가는 모집단이 급격히 늘어난 영향일 뿐 단순히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전문가들도 고령화로 인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고령 운전자에 대한 안전조치는 필요하지만 획일적인 기준에 의한 규제 성격의 조치는 지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노인단체 관계자는 “노인들의 교통안전을 보장한다는 제도 취지는 공감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며 “같은 나이라도 신체능력이 전부 다른 만큼 현재 시행 중인 적성검사를 강화해 면허 발급 조건을 달리하는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고 강조했다.

▲ 서울의 한 운전면허시험장 전경. [사진=뉴시스]

현재 정부는 고령 운전자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적성검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65~76세 미만은 5년, 75세 이상은 3년 주기다. 그러나 늘어나는 고령 운전자에 비해 검사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검사 자체가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제 주행 실력이나 기능 실력은 검증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편,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뒤늦게 수습에 나서는 모습이다. 경찰청은 별도의 자료를 통해 “조건부 운전면허는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가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면서 “나이와 상관없이 의료적·객관적으로 운전자의 운전 능력을 평가해 신체·인지 능력이 현저히 저하돼 교통사고 위험성이 높은 경우에 적용하겠다는 취지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