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월동기'는 누구인가요? [수상한 말수의사]

아이가 어렸을 적부터 꽤 오랫동안 다니던 병원이 있다.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하는 병이 있어서 가게 된 병원이다. 처음에는 매주 한 번씩 가다가, 조금 나아지면 격주로, 그다음은 한 달 간격으로 다녔다. 하지만, 아이는 계절에 따라 더 아프고 덜 아프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기 때문에, 병원에는 사실상 연중 상시 들락거리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선생님은 아이의 질병 상태뿐만 아니라, 생활 패턴과 성향까지 점점 더 자세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언제 다 나을지 끝이 아득하던 시절도 몇 년이 흐르니 아주 아주 조금씩 변해갔다. 아이가 점점 성장하면서 어쩔 때는 병원을 한 달 간격으로 가기도 했고, 때로는 두 달 넘게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느덧 병원을 출퇴근하던 시절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아예 잊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아이가 정기검진하러 한번 가야 한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이 아이를 참 이뻐했는데, 더 이상 자주 가지 않으니 근황을 알리지 못하고, 아주 조금씩 인사도 없이 완전히 멀어져 있었던 게 왠지 조금 송구스러웠다. 선생님은 아이의 상태와 안부를 혹시 한번 즈음 궁금해하셨을까?

사진출처 : 김아람

치료하는 이와 치료받는 이와의 긴 유대관계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아픈 동물을 접해왔던 나의 시절들을 어땠을까? 유독 기억이 나는 관계도 있지만 그 끝은 사실 모두 다 이별이었다. 긴 입원 기간을 버티며 완치가 되면 퇴원하게 되니 이별하게 되고, 치료를 하다가 죽어도 이별을 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병원일이라는 것은 긴 유대라는 게 생길 수 없이, 이별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외로운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10여 년 전 만난 한 마리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조직에 소속된 수의사이기에 인사발령에 따라 일하는 장소와 일의 종류가 바뀌게 된다. 그 말을 만난 그 당시에 나는, 치료 역할을 주로 하는 팀에서 막 일하기 시작했다. 그 말은 나이가 어린 제주말이었고 경주 용도로 사용 중이었다. 조그마한 체구의 까만 털을 가지고 있었고, 꼬리 끝은 하얀색이었다. 말은 내원 당시 몹시 상태가 좋지 않았고 집도의는 개복술을 했다. 나는 수술 후에 입원실에 있는 그 말을 전담 관리하는 역할을 하며 그 말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입원 중에도 말은 큰 차도가 없었고, 여러 가지 수치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높은 심박수와 높은 체온, 극심한 물설사, 심한 탈수 상태와 솟구치는 염증 수치는 며칠이 지나고, 일주일이 넘어가도 잘 교정이 되지 않았다. 주인은 말을 포기하지 않았다. 진료진은 여러 가지 시도를 지속했고, 끝이 없을 것 같은 긴 터널의 끝에서, 어느 시점부터 기적적으로 점점 생체 수치가 교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른 말들에 비해서 꽤 오랜 시간 입원실에서 그 말과 동고동락 하다 보니, 나는 어느덧 이 말과 끈끈한 유대가 생겨버렸다. 사실 말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고, 나 혼자만 생긴 유대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천만다행히 말은 결국 완치가 되었고, 나는 아쉽지만 또 그렇게 이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잘 몸관리를 하고 나면, 언젠가 경주마로 복귀해서 잘 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또 일상을 살았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들 역시 다들 이별하며 살고 있을 것 같다. 매년 학생들과 이별하는 선생님, 오랜 고객이나 동료와 이별하게 되는 다양한 직업인들은 다들 어떤 감정 정리를 하며 살아가는지 한 명 한 명의 마음이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말과의 이별은 이게 완전한 끝이 아니었다. 나 또한 또한 차례의 전보 인사가 갑작스럽게 생겨서 그 말이 복귀하는 경마장 안으로 근무지가 옮겨진 것이다. 이내 운동 복귀를 앞둔 그 말을 마침내 조우하게 되었다. 다른 공간에서 다른 역할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게 사람이 아니고 동물이라는 게 조금 묘했다.

그 말은 이제 만신창이가 되어서, 체중이 쏙 빠졌을 때의 축 처진 모습이 아니고, 눈에 총기가 넘치고 살도 제법 오른 상태여서, 전혀 다른 말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엄청나게 바뀌어 있었다.

사진출처 : 김아람

그 말과 나는 비슷한 시점에 장소를 이동해서 일을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나는 그 말을 우스갯소리로 '전보 동기'라고 불렀다. 내 전보동기는 점점 빛이 났다. 경주를 뛸 때마다, 제법 잘 뛰었다. 모든 말들이 잘 경주할 수 있도록 검사하는 것이 나의 업무였으나, 나는 그 말이 경주 전부터 경주를 마친 후까지의 모든 행동에 눈길이 한번 더 가기도 했다. 또한 우승하는 화면을 볼 때에는 마치 내가 이긴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뿌듯했다.

말은 해가 갈수록 점점 능력이 성장했고, 큰 경주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하기도 하며 점점 입지를 굳혀갔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몇 년 후 나는 또 다른 장소로 부서 이동을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내 전보동기를 잊고 있었으며, 또다시 생사를 넘나드는 말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몇 해를 뜨겁게 살았다. 크고 작은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리고 올해, 나는 또다시 전보동기 그 녀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의 삶이 한바탕 가열차게 돌아갔던 정신없는 시간 동안, 그 말은 이곳에서 꾸준히 루틴을 지키며 몹시 우수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음을 녀석의 기록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경주를 뛰는 그날, 이제 열 살도 넘는 녀석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예전에는 온통 어두운 색이었던 몸의 털이, 이제 제법 희끗희끗해져서 몽글몽글한 무늬의 흰털이 더 많이 보이는 회색말로 변해가고 있었다. 딱 나이가 든 제주말의 모습이다.

나 역시 이전보다 흰머리도 꽤 많아졌으며, 몸도 뭉툭하게 변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 재회는 왠지 반가움을 넘어선 일종의 동질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너나 나나 이렇게 말동네에서 늙어가며 한 세월을 같이 보내고 있는 '세월 동기'가 된 것 같았다.

아픈 시절만 찐하게 만나며 이별이 일상인 곳에서 살다가, 모든 말들이 팔딱거리며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고 있는 세상으로 와보니, 많은 것이 참 다르다. 그 다름 속에서 하나 감사한 건, 이곳에서는 변수가 많았던 이별보다는, 루틴을 그저 지켜봐 주는 게 일상이라는 것이다.

가장 건강한 컨디션일 때의 말이 얼마나 영민하고, 힘이 차 있는지 바로 옆에서 직관할 수 있다는 것, 그 모습을 주기적으로 꾸준히 볼 수 있다는 것이 존재 자체로서 좋은 기운을 받으며, 뭔지 모를 든든한 안정감을 준다.

사진출처: 김아람

하지만, 불규칙한 이별이 없고 루틴한 만남이 아직까지는 새롭게 다가오는 이곳 역시 또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뭉툭하게 보일 것을 나는 사실 안다. 삶은 늘 그랬던 것 같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싫어서 너무 섭섭했던 졸업식이 끝나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처음에는 내일이 없을 것처럼 반갑다가 결국은 점점 그것이 희미해짐을 우리는 사실 안다. 참 신기하다. 왜 항상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익숙해지면 그 감정을 놓쳐버리고 말까?

아이가 어린 시절에는 나는 하루하루 잘 먹고 잘 잘 수 있는 것 만을 염원했다. 그런데 이제는 병원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 그토록 사랑하고 매달렸던 그 무엇은 사실은 형체가 없는 파도 거품처럼 매 순간 생기고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사라짐과 식어감의 그 쓸쓸함 속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같은 세월을 함께 가고 있는 나의 ‘세월동기’가 어디선가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걸음을 걷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비록 나중에 또 잊고 사그라들지라도, 이렇게 한 번씩 다시 만나면, 그저 호들갑스럽게 들춰내서 기억해 주고 반가워해 주면 된다. 그러면 또 걸어갈 다리의 힘이 생긴다.

내 삶의 조그만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은 또 언제 불현듯 헤어질지 모른다. 그저 매 순간을 조금은 더 선명하게, 조금은 더 다정하게 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비록 내일 또 잊을지라도, 그러면 또 다짐하면 된다.

사진출처 : 김아람
코너소개 : 수상한 말수의사
한걸음 다가가기.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다가가는 게 망설여지는 한 인간의 고군분투기

글쓴이: 김아람
말 많은 제주도에서 사는 20년 차 말 수의사입니다.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를 공저했습니다.

브런치스토리: https://brunch.co.kr/@aidia0207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mal.ja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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