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베스파 프리마베라 125, 제주 여행에 낭만을 더하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의 제주도. 그 속을 유유자적 달리는 민트색 베스파. 지난달,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장면을 현실로 만들었다. 프리마베라 125와 동행하며 한라산과 해안도로 등 제주도의 다채로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탈리아 클래식 스쿠터와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 만난 2박 3일간의 기록을 전한다.

글|사진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2년 연속 9월에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흔한 여름휴가 시즌인 7~8월을 보내고 나면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고 날씨도 선선해 만족스럽다. 그런데 연이은 여행 이후에도 이루지 못한 로망이 있었다. 바로 ‘제주도 모터사이클 여행’이다. 나는 군 입대 1달 전, 이틀 동안 125㏄ 스쿠터를 빌려 제주도를 누빈 적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주도에 대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첫날부터 비가 내려 아쉬움이 컸다. 이튿날엔 부랴부랴 유명 관광지와 맛집을 돌아다니느라 여유를 즐길 틈이 없었다.

반면 여행을 마친 소감은 아주 강렬했다. 유리창과 지붕 없이 제주도의 자연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자동차로 느낄 수 없는 영역이었다. 피하려고 애를 썼던 뜨거운 햇빛과 드센 바람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7년이 지난 올해, 다시 한번 두 바퀴로 제주도를 달리기로 했다. 그렇게 매주 라이딩을 함께하는 친구와 헬멧을 들고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아직 2종 소형 면허를 취득하지 못한 나는 125㏄ 매뉴얼 모터사이클을 빌리려고 했다. 인천-제주행 배편 중단으로 각자의 차를 가져가지 못해, 겸사겸사 타보지 못한 기종을 예약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휴가를 1주일 앞두고 결정을 바꿨다. 매일 변속과 제동 탓에 바쁜 양발에 쉴 시간을 주자고. 덤으로 아름다운 장소에 어울리는 예쁜 디자인도 필수 조건이었다.

유일한 결론은 베스파(Vespa), 그중에서도 대표 모델인 프리마베라 125(Primavera 125)를 골랐다. 프리마베라는 1968년 처음 등장한 유서 깊은 이름. 2014년부터 국내에 들어오면서 125㏄ 라인업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주로 상업용으로 쓰는 일본산 125㏄ 스쿠터보다 실용성은 불리하지만, 독보적인 디자인으로 데일리 스쿠터를 찾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시승차를 받으러 간 곳은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피아지오 베스파 제주’. 2020년 9월 처음 오픈했으며, 제주도 베스파 오너들의 필수 방문 코스다. 지난 4월 지금의 자리로 확장 이전해 서비스 범위를 더욱 넓혔다. 베스파뿐만 아니라 인디언과 와코, 캔암 등도 취급하며, BMW와 두카티, 트라이엄프 등 다양한 기종을 수리할 수 있다.


메인 전시장은 기존 창고였던 공간을 완전히 탈바꿈시켜 만들었다. 내부를 가득 채운 형형색색 베스파들. 입장과 동시에 눈이 즐겁다. 지난해 발표한 스프린트 125×저스틴 비버 협업 모델도 만나볼 수 있었다. 한쪽 벽에는 앞뒤 캐리어와 탑 박스, 가방 등 정품 파츠를 전시해 각자에게 필요한 옵션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멀리서도 눈길 끄는 클래식 스쿠터, 프리마베라 125

드디어 그린 릴랙스(Green Relax) 컬러의 프리마베라 125를 만났다. 이름은 그린이지만 흔히 아는 민트색에 가깝다. 디자인은 클래식 그 자체. 원형 헤드램프와 사이드미러, 부드러운 유선형 차체, 카울 양쪽을 두른 크롬 장식, 밝은 갈색 시트가 조화롭게 어울린다. 한쪽 면이 훤히 드러난 휠도 마찬가지. 모기업 피아지오가 과거에 만들던 항공기 바퀴로부터 영향을 받은 디자인이다.

종종 ‘클래식’이라는 이유로 편의성과 타협하는 모델이 있다. 반면 프리마베라 125는 운전자에게 불편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선명한 LED 헤드램프는 샛노란 할로겐 램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밤길을 환하게 비춘다. 디지털 클러스터는 연료량과 주행거리, 현재 시간을 띄운다. 오른쪽 스위치 뭉치의 ‘MODE’ 버튼을 누르면 트립 A, B와 누적 주행거리를 번갈아 표시한다.

키 164㎝ 기준 포지션은 위 사진과 같다. 시트고는 790㎜인데, 허벅지 부분이 넓다 보니 정자세에서 완벽한 발 착지가 어렵다. 정차할 때마다 몸을 앞으로 살짝 빼거나 한쪽으로 기울여야 한다. 핸들 높이는 적당한 수준.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아 장시간 운전도 무리 없다.

시동을 걸고 출발. 첫인상은 ‘편안함’이었다. 프리마베라 125는 초보 라이더가 타기에 상당히 좋다. 가볍고 무게중심이 낮아서다. 차체가 전부 철판이라 은근히 무거울 줄 알았는데, 막상 제자리에서 좌우로 흔들어보니 혼다 슈퍼커브만큼 가볍다. 초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제꿍(제자리에서 한쪽으로 넘어지는 일)’ 걱정은 충분히 내려놔도 좋다.

낮은 무게중심은 저속에서 균형을 잡는 데 유리했다. 출발과 정차 순간, 느린 속도로 움직일 때 양쪽으로 비틀거리는 일이 현저히 적었다. 덕분에 생전 처음 타는 이탈리안 스쿠터에 빠르게 적응했다. 아기자기한 디자인부터 간편한 조작 난이도까지. 산뜻한 프리마베라 125와의 첫 만남은 제주도 여행에 활기를 더하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두 바퀴 여행에 가장 잘 어울리는 베스파

보통 여행 계획을 짜면 관광 명소나 맛집을 거점으로 경로를 짠다. 하지만 모터사이클을 타면 이동 자체가 목적이 된다. 우린 끼니 때울 장소를 정하고, 최단 경로 대신 가장 경치가 훌륭한 길로 루트를 정했다. 첫 드라이브 코스는 조천읍에서 한경면까지 구간. 한라산 주변 빽빽한 숲과 굽이진 도로를 거쳐 단번에 제주도 서쪽으로 향했다.

제주도의 1131, 1139, 1115, 1117번 도로는 한라산의 중심과 가장 가깝게 닿아 있다. 그중 1131번 및 1139번 도로는 경사가 크고 구불구불하다. 게다가 노면이 젖기라도 하면 이륜차 통행에 주의해야 한다. 때문에 일부 이륜차 렌터카 업체들은 통행금지 조항을 걸기도 한다. 다행히 여행 이틀 전 폭우가 그치고, 강렬한 햇빛이 땅을 말려 가벼운 마음으로 진입했다.

프리마베라 125의 최고출력과 최대토크는 11마력 및 1.1㎏·m. 평지에선 사뿐하게 속도를 올리는데, 한라산 인근을 오르기 시작하니 조금씩 힘이 부친다. 엔진은 아우성치는데 앞 차를 따라가기 버겁다. 그래도 방법이 없다. 엔진 회전수 관리는 무단변속기에게 온전히 맡겨야 한다. 잠깐이지만 매뉴얼 기어가 그리운 순간이었다.

출력에 대한 아쉬움은 딱 오르막길까지. 고생 끝에 찾아온 내리막길에서 경치와 와인딩을 즐겼다. ‘스쿠터로 무슨 와인딩이야?’라고 묻겠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무릎으로 연료탱크를 붙들며 몸을 기울이는 긴장감 대신 낮은 속도로 살랑살랑 코너를 타는 상쾌함이 있다. 그만큼 주변을 바라볼 시간도 늘어난다. 긴박함을 버리고 느긋함을 키웠다. 어쨌든 여행이니까.

이어지는 시골길. 신호와 좌·우회전을 거듭할수록 124㏄ i-get 엔진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스로틀 반응이 상냥하다. 오른손을 거칠게 비틀어도 힘을 ‘울컥’ 내뱉는 일이 없다. 그래서 정지 상태에서 출발하거나 재가속을 할 때 마음이 편하다. 이후 시속 60㎞까지 시원하게 가속하며, 시속 80㎞ 부근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주행한다.

그리고 부드럽다. 진동을 잘 억제했다. 스로틀을 끝까지 당겼을 때 불쾌한 소음과 떨림을 느끼기 어렵다. 주변으로 배기량 높은 모터사이클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시동을 켠 사실도 눈치채기 힘들 정도다. 3일간 300㎞ 이상 운전하면서 엔진 진동 때문에 피곤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본격적인 일정은 이틀째부터였다. 이날은 바닷가를 집중적으로 달렸다. 사실 이번 여행 자체가 ‘모터사이클로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고 싶다’라는 소박한 목표에서 시작됐다. 제주시 숙소에서 출발한 우린 표선 해수욕장에서부터 제주도 외곽 도로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로 했다.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 등 대표 관광지와 광치기, 평대, 월정리, 김녕, 함덕 해수욕장을 모두 거치는 코스다.

오랜만에 만난 성산일출봉. 이미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방문했지만, 베스파와 다시 찾아오니 감흥이 다르다. 가까워질수록 비현실적인 크기와 진한 색깔에 압도당한다. 계획과 다르게 홀린 듯 주차장까지 입성. 따가운 햇볕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발걸음은 언덕으로 향했다. 산책로 끝에서 나를 기다린 건 수천 년 동안 쌓인 용암의 단면. 그 위에 자란 풀들과 투명한 바다, 멀찍이 보이는 우도까지 순식간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 호강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턴 내비게이션도 찍지 않고 무작정 해안도로를 달렸다. 여행객들이 잘 찾지 않는 바닷가 구석구석까지 들쑤셨다. 골목이 좁아도 괜찮다. 프리마베라 125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라면 거뜬히 지나간다. 자동차를 타고 왔다면 놓쳤을 소소한 모습까지 포착할 수 있다. 좋은 경치가 보이면 일단 들어가보는 즉흥 여행. 모터사이클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운전하느라 바다 구경은 제대로 하겠어?’라는 걱정도 필요 없다. 해안도로는 생각보다 많이 굽어있다.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멋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뜻이다. 해수욕장을 하나씩 지나자 그림체도 변해갔다. 빛의 방향과 양, 도로와 바다 사이의 거리, 물의 깊이에 따라 서로 다른 장면을 뽐낸다. 지금껏 몰랐던 제주도의 새로운 색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단점을 하나만 고르자면 단단한 승차감.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하체가 꽤 튼튼하다. 갈라진 아스팔트나 과속방지턱 위를 올라가면 앞바퀴를 통해 솔직한 피드백이 올라온다. 도심에서 매일 타는 스쿠터인 만큼 노면 충격을 거르는 능력을 더 키웠으면 한다. 이외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성능이었다.

어느덧 프리마베라 125를 보내줄 시간이 다가왔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시작했던 여행. 친절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의 스쿠터를 만난 덕분에 행복한 기억만 남았다. 의도대로 따라오는 가벼운 차체는 운전에 대한 부담을 덜었고, 아이코닉한 디자인은 시트에서 내려 쉬는 시간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프리마베라 125의 통통 튀는 맛이 이번 휴가의 콘셉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베스파가 정답은 아니지만, 아직 제주도에서 타보지 않았다면 꼭 접해보길 바란다. 스탠드를 올리고 출발하는 순간 배기량의 한계를 뛰어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제주도 추천 식당&카페

1. 양가형제(제주 제주시 한경면 청수동8길 3)

제주시 한경면 청수리에 위치한 수제버거집.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한 식당이다. 레트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실내에 들어가면 사장님의 친절한 메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추천 메뉴는 패티의 맛에 집중할 수 있는 시그니처 버거 ‘양버거’와, 통새우살과 사과슬라이스가 어우러진 ‘양새우버거’. 양버거는 1팀 당 1개만 주문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큼직하게 튀긴 양파튀김도 퀄리티가 상당하다.

2. 코바(COBA, 제주 제주시 서해안로 348-1 COBA PUB&CAFE)

제주공항 뒤편을 달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라이더 카페. 힙한 분위기의 실내외, 특히 사장님의 개인 소품으로 꾸민 인테리어가 압권이다. 실내 한가운데에 자리한 올드 베스파도 구경거리. 새벽 1시까지 영업하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도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다. 제주도에는 라이더 카페가 흔하지 않으니, 모터사이클 투어 중이라면 꼭 한 번씩 들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