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사회심리학] 고통은 '주관적'…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유
우리가 흔히 '인생은 고통'이라고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고통(suffering)의 의미에 관해 조사할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신체적, 심리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 의사들이 주로 만성 통증, 말기 암 환자들을 치료하는 입장에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헌들이 다수 있었다.
"고통은 개인의 온전함을 위협하는 사건들에 의해 괴로움을 경험하는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 고통은 사회적 역할, 집단 정체성, 자기 자신과의 관계, 신체적 측면, 가족과의 관계, 또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관계와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다(Cassell, 1982)."
1982년 에릭 카셀이라는 의사는 고통에 대해 위와 같은 정의를 내렸다. 흥미롭게도 신체적 통증 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괴로움들을 아울러 고통을 정의한 것을 볼 수 있다.
관련 문헌들을 더 조사하던 와중 또 다른 흥미로운 연구를 만날 수 있었다. 헨리 비처라는 의사가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돌아온 군인들과 사고 등으로 인해 비슷하게 큰 부상을 입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었다.
통증과 관련해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사실이라면 의학적, 객관적으로 심각한 부상 정도와 개인이 느끼는 통증의 강도, 통증으로 인해 느끼는 불행 사이에 생각보다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같은 부상을 입어도 어떤 사람은 아직 버틸만 하다고 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삶의 희망을 잃을 정도로 큰 영향을 받는다.
비처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군인들과 각종 사고로 인해 비슷한 수준의 부상을 입은 민간인들을 비교했다. 그 결과 평균적으로 군인들의 부상이 더 심각했음에도 군인들은 민간인들에 비해 사고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덜 받은 듯 보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 군인들은 통증은 심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나왔고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큰 안도감과 행복을 느꼈다는 점을 지목했다. 반면 민간인들은 평온한 일상을 누리다가 갑자기 부상으로 인해 삶이 망가졌다고 느꼈다고 한다.
부상 전후 비교의 기준이 거대한 죽음의 소용돌이였던 사람들은 부상을 입은 고통보다 죽다가 '살아났다'는 기쁨이 더 컸고 반대로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사람들은 부상을 갑작스럽게 닥쳐온 거대한 불운으로 바라보고 슬픔에 잠겼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군인들은 약 32%만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해 달라고 했지만 민간인들은 83%가 강력한 진통제를 원했다고 한다. 이런 관찰을 통해 비처는 "환자들이 종합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의 정도는 신체적 통증이 그들에게 있어 어떤 주관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나치 치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는 절대적인 절망 속에서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자신은 수용소 안에서도 이따금씩 하늘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었고 따라서 살아남았다고 이야기했다.
반면 무엇보다 마음이 텅 비어 있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어 나갔다고 언급했다. 고통은 어떤 형태로든 아무 때에나 우리 삶을 덮쳐오지만 마음에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의 마음만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거대한 고통 앞에서도 담담하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사람은 마음이 죽을 때 진짜로 죽는다는 점이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들을 떠올려 보면 몸이 힘든 것 보다도 마음이 지옥일 때였다.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 내밀어진 손을 잡지 못하고 내가 나의 존엄성을 의심하고 내 삶이 가치 없다고 느낄 때면 살아있는 것이 너무 큰 짐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다른 이유보다 스스로가 자신을 하찮고 쓸모 없고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길 때 그 괴로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살기 위해) 죽음이라는 탈출구를 선택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우리는 다 연약하고 휩쓸리기 쉬운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서 아주 작은 일에도 위태롭게 흔들릴 수 있는 미약한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고통이라는 표현이 꽤 정확하다고 느껴진다. 언제라도 마음이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가여운 존재들이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인가보다.
그럼에도 내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질 때면 언젠가 뉴스에서 접한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초등학생을 떠올리곤 한다. 그 아이가 겪은 사건 자체는 매우 사소하지만 그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아이의 작은 마음은 날개 없이 추락했던 것이 아닌지.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지 생각해본다.
Beecher, H. K. (1956). Relationship of significance of wound to pain experienced.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61(17), 1609-1613.
※필자소개
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박진영 심리학 칼럼니스트 parkjy02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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