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환경’이라는 딱지는 마컬에서 사는 브로콜리나 상추에만 붙는 줄 알았다. 하지만, 책장 위에 쌓아둔 PC 부품 상자를 하나둘 들춰보니, RoHS나 Green Dot처럼 유해물질 사용을 제한했거나 포장재 재활용 시스템에 참여했음을 알리는 엠블럼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그만큼 PC 시장에서도 ‘친환경’은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라, 어느새 자연스럽게 스며든 하나의 옵션이 된 것이다. 막상 현실은 조금 다르다. 온라인에서 무심코 구입한 PC 부품 박스 어딘가에 붙어 있는 이 인증 마크들, 정작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친환경 인증 제도와 엠블럼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지만, 실제 구매 과정에서 이를 기준으로 제품을 고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친환경 PC 바람은 2021년부터

친환경 바람이 PC 시장에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건 2021년이다. 2021년에 대한민국은 탄소중립기본법을 세계 14번째로 시행했고, 글로벌 투자자들의 75%가 ESG(Environmental / Social / Governance)를 투자 결정의 주된 요소로 꼽으면서 "ESG 안 하면 투자 못 받는다"는 시장 공포가 형성됐을 정도다.

기업 중에서는 글로벌 PC 제조사 Acer가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재생 플라스틱을 적용한 친환경 PC 브랜드 ‘베로(Vero)’를 전면에 내세우며 흐름을 가시화하자, Dell, HP, Lenovo 등 주요 제조사들도 관련 행보를 더욱 강화했다. 더불어 2021년 절정이었던 코로나 팬데믹으로 폭발한 노트북 수요와 맞물려 ESG와 친환경 소비에 대한 관심도 빠르게 확산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변화는 빅테크 기업들의 공급망, 즉 부품 하청 업체로부터 시작됐다. Apple, Microsoft 등 발주 규모가 어마어마한 빅테크 기업들이 협력사, 즉 하청 업체에 탄소 감축과 재생에너지 전환을 적극 요구하면서, PC 제조사들은 선택이 아닌 대응의 영역에 놓이게 됐다. 이제 친환경 옵션은 단순한 기업 이미지 전략이 아니라, 실질적인 거래 조건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2026년.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였던 Acer, HP, Dell 등 글로벌 제조사들은 재활용 소재 적용, 종이 포장재 전환, 중고 제품 회수 프로그램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완제품 위주다 보니, 실제 조립 PC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PC 부품의 영역에서는 제조과정의 환경 오염 요인 감소와 실제 해당 부품의 에너지 효율, 소비면의 투트랙으로 살펴봐야한다. 과연 PC 부품 각 영역에서는 친환경 정책을 준수하고 있을까? 5년간의 친환경 성적표를 매겨보았다.

PC 부품 시장의 친환경 성적표는?

제일 먼저 CPU는 B+다. 공정 미세화가 계속되면서 와트당 성능 <효율>이 실질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AMD가 TSMC 공정으로 인텔 대비 전력 효율 우위를 점하고, 인텔도 이에 화답하는 경쟁 구도가 효율 개선을 가속하고 있다. 어느 정도 에너지 낭비를 막는 친환경 정책의 방향성과는 일치되는 모습이다. 다만 개선 방향이 에너지 절대 '소비량'이 아닌 효율(%)에 국한된 것이 문제다. 절대 소비전력은 CPU의 세대가 거듭날수록 늘어나게 된다. 쉽게 말하면, 10년 전보다 훨씬 똑똑하게 전기를 쓰게 되어 낭비를 줄였지만 정작 사용하는 전기의 총량은 오히려 늘었다는 것. 방향은 맞지만, 도달한 건 아직 아니다. 그래서 B+다.

역시 그래픽카드는 F, 낙제점이다. 지금 일반 소비자용 그래픽카드 중 최고 스펙인 RTX 5090의 단일 소비전력은 약 575W로, 5년 전 플래그십 GPU 대비 두 배 이상으로 뛰어올랐다. 미친 성능의 대가는 미친 소비전력이라는 말을 증명하는 셈이다. GPU TDP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연평균 41.5% 증가했는데, AI용 GPU 수요 폭증이 이 흐름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제조사들은 소비전력이 치솟는 GPU에 'AI 가속', '차세대 아키텍처'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만, 친환경이라는 단어만큼은 붙이지 않는다. 그게 현실을 가장 잘 말해준다. 그래픽카드가 지구의 에너지를 침식하는 빌런같이 느껴진다.

파워서플라이의 성적은 CPU와 마찬가지로 B+다. 80PLUS 골드 이상이 중저가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것은 실질적인 성과라 느껴진다. 시장 전체의 전력 변환 효율이 올라갔고, 기업용 PC 시장에서도 고효율 파워 서플라이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구조적 한계가 있다. GPU 소비전력이 치솟으면서 600W로 충분했던 표준 파워서플라이가 이젠 1000W 이상급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효율(%) 개선이 용량(W) 증가에 잠식당하는 구조다. 80PLUS 티타늄 인증을 받은 파워를 써도, 그 파워가 감당해야 하는 GPU가 두 배씩 커지면 결국 전기는 더 많이 쓰인다. 인증 등급은 올라가는데 전기요금도 함께 올라가는 아이러니가 현재 파워 서플라이 시장의 현실이다. 그래서 가장 에너지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분야임에도 A를 받지 못한 것이다.

메인보드의 성적은 B다. RoHS 유해물질 인증이 사실상 기본으로 자리 잡은 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납, 수은 등 유해물질 사용을 제한하는 최소한의 환경 기준은 대부분의 제조사가 충족하고 있다. 하지만, 발전 방향성이 문제로 거론된다. 최근 CPU와 GPU의 전력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를 감당하기 위한 전원부 규모 역시 함께 커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용되는 부품 수와 PCB 복잡도는 늘어나고, 제조 단계에서의 자원 소모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제조 환경은 개선되고 있지만, 메인보드가 발전하는 방향은 전력 소비가 큰 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 이는 친환경 정책과는 미묘하게 어긋하는 방향이다.

RAM과 SSD는 보류다. DDR5가 DDR4보다 저전력이라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금 시장에서 친환경을 논하기 가장 어려운 부품이기도 하다. AI 반도체 대란으로 2025년 하반기부터 가격이 급등하면서 부품 수급이 시장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심지어 소비자들이 가격 때문에 구형 DDR4, DDR3 시스템으로 회귀하는 역류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친환경 소재나 설계에 대한 논의 자체가 시장에서 실종된 상태다. 수급이 해결되기 전까지 친환경은 이 분야에서 뒷순위 의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류하게 되었다.

케이스는 B다. PC 부품 중 유일하게 반도체 공정이 필요 없는 부품이다. 금속을 성형하고 도장하면 완성되는 구조 덕분에, 재활용 소재 적용이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한 영역이다. 실제로 알루미늄 전환과 재활용 소재 적용 비율이 조금씩 늘고 있고, 고급화 트렌드와 맞물려 내구성 좋은 금속 케이스가 선호되는 흐름도 장기적으로 보면 환경에 유리하다. 다만 어디까지나 10만 원 이상 고급 제품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라 문제다. 2~3만 원대 보급형 케이스는 플라스틱 재질이 대부분이라 제조 환경 및 산업 폐기물 문제가 태생적으로 따라 다닐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소비자들 관심의 대부분은 RGB 조명과 강화유리 패널에 집중돼 있고, 친환경 소재 여부를 따져 케이스를 고르는 소비자는 극소수라는 것도 감점 요인이다. 시장이 친환경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A는 아직 이르다.
그린워싱까지 등장, 하지만 갈 길은 멀다!

PC 부품 시장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메모리와 SSD, 그리고 전력 블랙홀 그래픽카드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B까지는 받을 수 있는 친환경 성적표를 보여주었다. 효율이 개선되고 재활용 소재가 사용되면서 정부 규제와 ESG 투자 방향에 부합하는 행보를 걷고 있다. 하지만 이 친환경 프리미엄을 노린 이른바 '그린워싱'이 PC 부품 시장에서도 나타나 주의가 필요하다.
그린워싱의 가장 흔한 수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포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쿨링팬에 재생 플라스틱 10%를 섞었다며 제품 전체를 '에코 디자인'으로 홍보하거나, 포장재만 종이로 바꾸고 '친환경 제품'을 내세우는 방식이다. '2030년 탄소중립' 같은 미래 목표를 현재 제품 라벨에 버젓이 넣는 경우도 있다. 아직 달성하지 않은 것을 달성한 것처럼 표현하면 그 자체가 그린워싱이다. 파워 서플라이 광고에서 흔히 보이는 '80PLUS 골드 인증 친환경 제품'도 마찬가지다. 80PLUS는 전력 변환 효율 인증이지 환경 인증이 아니다. 제조 과정의 탄소 배출, 유해물질, 폐기 영향 중 어느 것도 평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환경 PC의 앞날은 고무적인 편이다. 2025년 국내 그린워싱 위반 건수는 전년 대비 49.6% 줄었다. 규제가 정착되면서 시장이 스스로 교정되고 있다는 신호다. EU는 기업이 친환경을 주장하려면 원자재부터 폐기까지 전 생애주기 환경 영향을 입증하도록 의무화했고, 이 기준은 글로벌 시장 전체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더불어 삼성전자도 반도체 제품 탄소발자국 인증을 14종까지 확대하는 등 국내 주요 기업들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며 친환경 정책에 동참하고 있다.

앞으로 정부와 국제 사회의 규제는 더 강해질 전망이다. 따라서 미래를 위한 소비자라면 앞으로 PC 부품을 구입할 때 친환경 인증 데이터베이스를 꼭 확인하고 근거 없는 그린워싱 제품을 걸러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이 친환경 PC 시장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될 것이 때문에.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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