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들장미’의 주인공 그녀!!
[홍성광의 독일 작가들의 사랑 이야기]
괴테 21세에 만난 연인 프리데리케
명문가의 괴테, 시골 출신 연인에 실망
편지로 이별 통보한 후 평생 죄책감
30세에 재회했지만 '괴테의 장래' 위해
서로가 마음 접어...연인은 쓸쓸한 여생
문학계의 제우스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문학계의 제우스' 같은 인물이다. 천재성이 신의 경지이기도 하지만, 그의 연애사(史) 역시 제우스의 신화에 필적할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여성들을 흠모하고 사랑했으며, 또한 뭇 여성들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첫사랑의 소녀는 술집에서 심부름하던 그레트헨(Gretchen)이다. 괴테는 그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묘사한다. 좀 커서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닐 때는 쇤코프(Anna Katharina Schönkopf)와 사귀었다. 그녀는 괴테가 16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해 그 시절에 출입하던 술집 주인의 딸이었다. 괴테는 세 살 연상인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출신인 그와 평범한 집안의 여성 사이의 사랑은 애당초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이후에도 괴테는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막시밀리아네, 릴리, 마리안네, 울리케 등 숱한 여성을 사랑했다. 그는 천재였고 바람둥이였다. 괴테의 사랑 이야기에서는 그중 가장 유명한 프리데리케와 울리케 두 사람 얘기를 다룬다. 이번 칼럼은 먼저 프리데리케와의 사랑이야기다.
제젠하임의 목사 딸 프리데리케
16세에 들어간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 괴테는 방탕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곤 심신이 피폐해져 아버지가 원하던 졸업장도 받지 못한 채 고향인 프랑크푸르트에서 휴양해야 했다. 집에서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동생 코르넬리아(Cornelia, 1750~1777)의 간호를 받으며 육체적·정신적 위기를 이겨낸 뒤, 21세의 괴테는 1770년 봄에 법학 공부를 위해 스트라스부르로 떠난다.
그해 10월 괴테는 친구 바이란트(Weyland)와 함께 제젠하임(Sesenheim)에 있는 브리온 목사집을 찾아갔다. 마차로 세 시간 걸리는 거리였는데, 그 집에 예쁜 딸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난한 신학생 복장으로 위장해 갔다. 목사의 둘째 딸 프리데리케(Friderike Brion, 1752~1813)는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날씬한 소녀로, 괴테는 그녀의 귀엽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사랑의 시작과 끝
프리데리케에 반한 괴테는 옷을 바꾸어 입고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괴테는 겨울부터 몇 달 동안 여러 차례 제젠하임을 방문해 수 주일씩 브리온 가족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한적한 시골 분위기, 아름다운 프리데리케, 브리온가(家)의 가정적인 분위기가 괴테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녀는 시골 하늘에 솟은 아름다운 별처럼 보였다.
괴테로서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나날들이 한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가끔 둘이서 들로, 산으로 나가 키스와 포옹을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괴테는 헤르더(Herder)로부터 받은 지적 자극의 균형추를 새로운 사랑에서 찾는다.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는 18세기 독일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였으며, 신학자·철학자·작가, 문예비평가이기도 했다.
제젠하임의 자연환경은 괴테가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데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괴테는 그녀에게 많은 사랑의 시와 노래를 바쳤다. 어느 날 아침 괴테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프리데리케, 일어나서
밤을 쫓아버려.
네 눈빛 중 하나를 통해
낮이 밝아질 수 있어!”
요즘은 평범해 보이는 사랑의 시 구절이지만, 당시 프리데리케와의 사랑은 라이프치히에서처럼 고통을 주는 것과는 달랐다. 한마디로 행복감으로 충만된 밝은 사랑이었다. 그는 목사관을 자주 찾았고 학업 때문에 가지 못할 때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프리데리케는 음악을 좋아해 피아노를 치거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알사스의 민요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프리데리케와 함께 주변 지역을 여행했고, 라인강에서 보트 여행을 함께 했다.
제젠하임은 이 시인에게 있어 ‘지구의 중심’이었다. 1771년 봄에 괴테는 몇 편의 시와 노래를 썼는데, 때때로 색칠한 리본을 붙여 프리데리케에게 보냈다. 괴테는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시작(詩作)에 대한 흥미가 뜻밖에 이 지방에서 다시 나타났다”라고 『시와 진실』에서 쓰고 있다. 시 「만남과 헤어짐」은 어두운 저녁나절 말을 타고 여인에게 가서 만나고 다음날 아침 헤어지는 광경을 묘사하는 시였다.
“내 마음은 온통 그대에게로 가 있었고
숨 쉬는 것조차 그대를 위한 것이었지.
[.....]
나는 떠나고 그대는 고개를 떨구고
촉촉이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
「오월의 축제」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젊음과 즐거움, 용기를 얻는다.
“그대는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을 추게 하였지.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영원히 행복해라.”
이 시는 1771년 5~6월 괴테가 프리데리케와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두 연인은 손을 잡고 들판으로 나가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곤 했다. 이때가 둘이 나눈 '사랑의 절정기'였다. 그런데 한번은 학위 논문을 제출해야 했던 괴테는 약 2주간 제젠하임에 갈 수 없게 되자 프리데리케의 가족과 친척이 스트라스부르로 나들이를 왔다. 프리데리케를 비롯한 시골 사람들은 이 도시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낯설어 했다. 괴테는 차츰 그녀에게서 마음이 조금씩 멀어져갔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지루해지고, 그녀의 촌스러운 복장에 거부감을 느꼈다.
편지로 결별을 통고하는 괴테
괴테는 이들이 스트라스부르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프리데리케에 대한 사랑의 감정마저 정리한다. 시골 처녀인 그녀는 도시에서 세련된 멋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느꼈다. 게다가 그녀는 체질적으로 몸이 약하고 병을 앓고 있어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맘에 걸렸다. 괴테는 그동안 소홀히 한 공부에 몰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프리데리케를 멀리하게 된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했던 것이다.
괴테는 1771년 8월 법학석사 학위를 받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고향인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그녀도 가슴 아픈 편지로 그에게 답장을 보내 둘 사이는 끝이 난 듯했다.
그녀는 괴테가 편지로 일방적인 결별 선언을 한 데 큰 충격을 받았다. 괴테는 훗날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순수한 여성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며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그레트헨'에게는 프리데리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고, 그레트헨을 배신한 '파우스트'를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로 묘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괴테는 자신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청춘기에 아무 목적 없이 품은 애정을 “밤에 던져진 폭탄”으로 비유했다. 즉, 폭탄은 밤하늘에 아름답게 솟아오르지만 결국 그 자리에 떨어져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는 영혼의 불안을 느꼈다고 둘러댔지만, 실은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성격에다 한 여자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고 약혼, 결혼 같은 형식에 구애받는 것을 거부했다.
괴테는 ‘충동과 혼란’의 심리 속에 프리데리케를 마지막으로 만난 뒤 말을 타고 샛길로 드루젠하임으로 가면서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는 육안이 아니라 심안(心眼)으로, 자신을 향해 말을 타고 같은 길을 오는 그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괴테는 후일 우연히 같은 옷을 입고 그 길을 따라 프리데리케를 방문하러 갔다. 칼 야스퍼스는 이 사례를 들어, 자기 신체를 외부 세계에서 다른 제2의 신체로 지각하는 현상을 ‘분신 망상’이라고 칭했다.
괴테의 뒤를 이은 천재 시인 렌츠
괴테의 변명을 멀리하고, 실제로 프리데리케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다음 해 괴테의 뒤를 이어 프리데리케를 사랑했던 작가 렌츠(Jakob Lenz, 1751~1792)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녀의 마음을 빼앗고 떠나가 버린 사나이’라며 괴테의 무책임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거의 지워졌지만
그가 했던 말의 위력과
그 순간의 행복과
꿈같은 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1772년 여름, 렌츠는 연인과 이별한 슬픔에 시달리고 있던 프리데리케에게 구애를 했다. 그러나 렌츠와 프리데리케의 사랑 역시 불행으로 끝난다. 렌츠는 괴테 못지않은 뛰어난 질풍노도기의 천재 작가였다. 괴테가 세상을 떠난 뒤 1835년 괴테의 『제젠하임 시집』이 발간되었다. 이 중에서 프리데리케에게 보낸 연애시 11편이 그녀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중 최소한 다섯 편은 렌츠의 시로 확인되었다. 그녀는 천재들의 사랑을 훔치는 매력이 있었던 여인이었다.
다시 만난 괴테와 프리데리케
두 사람이 헤어지고 8년 후인 1779년, 서른 살의 괴테는 프리데리케를 다시 찾았다. 이때는 괴테가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에 가서 고위 관직을 맡은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아우구스트 공을 모시고 교양 여행차 스위스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것이다. 프리데리케 가족은 마치 반년 전에 헤어진 듯 무척 반갑게 괴테를 맞이했다. 프리데리케 역시 괴테가 말없이 떠난 것을 가볍게 넘겨버리고, 자신이 병을 이겨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둘은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옛날 앉았던 낙엽 속에 다시 앉았고, 그녀는 괴테에게 온갖 것을 물어보았다. 괴테는 그날 밤을 거기서 머무르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뜰 때 정다운 그녀, 그녀 가족들과 작별을 했다.
프리데리케는 천재 시인 괴테의 장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진해서 괴테를 단념했다. 괴테 역시 한때의 열정에 마음이 흐려졌던 모습과 달리 담담하게 옛일을 회상할 뿐이었다. 그녀와의 재회보다는 이 지방의 풍경이 그에게 훨씬 강한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자서전인 『시와 진실』을 쓸 때까지 프리데리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 자서전에서 다룬 프리데리케와의 사랑 이야기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제젠하임은 아예 순례지가 되었다. 프리데리케 숭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프리데리케
괴테는 1811년에 나온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프리데리케와의 사랑을 아름다운 과거사로 묘사했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괴테가 만난 '가장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으로 그려졌다. 사실을 변형하고 미화시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인에게 깊은 상처를 준 것에 괴테는 평생 죄책감을 느꼈다.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에서, 샤를로테를 만난 괴테는 ‘청산되지 않은 빚’에 대해 사과한다. 그러자 샤를로테는 자기가 아닌 프리데리케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나무랐다. 샤를로테는 프리데리케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지 못했다며 안타깝게 생각했다.
괴테가 떠난 후 연인 프리데리케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았으나 그 아이는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언니와 함께 리본 가게를 열어 근근이 살았으며, 나중에는 바덴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홀로 기거했다. 만년에는 괴테에 대해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는 노년에 동생의 집에 기거하면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다가 1813년 61세로 쓸쓸하게 사망한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