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세라티가 르반떼 이후 6년 만에 새로운 SUV를 선보였다. 바로 그레칼레(Grecale)다. 브랜드 최초의 SUV가 이룬 성공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나타났다. 과연 그레칼레는 포르쉐 마칸과 BMW X4 등 쟁쟁한 라이벌 사이에서 살아남아 브랜드 핵심 모델로 거듭날 수 있을까?
글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사진 마세라티, 서동현

프리미엄 브랜드에게 SUV 라인업은 필수다. 필요성은 이미 포르쉐가 21년 전에 증명했다. ‘진짜 포르쉐가 아니다’라는 의심 속에서 데뷔한 카이엔은 첫해 판매량만 2만 대를 돌파했다. 출시 후 10년 동안 세운 판매기록은 37만8,560대. 이어 2014년 더 작고 저렴한 마칸을 출시해 기존 소비자는 물론, 신규·여성 고객 비율을 크게 늘려 포르쉐의 성장을 이끌었다.
마세라티도 SUV 개발 효과를 톡톡히 봤다. 2016년 공개한 르반떼가 주인공이다. 이전까진 기블리와 콰트로포르테만으로 연간 약 1만5,000대의 실적을 냈다. 르반떼 출시 1년 뒤, 마세라티 글로벌 판매량은 약 4만6,200대로 치솟았다. 무려 48%가 르반떼였다. 그런데 전성기가 생각보다 짧았다. 2020년 1만7,000대 규모까지 내려왔다가, 최근에는 2만4,000~2만5,000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실적의 중심에는 MC20와 그레칼레가 있다. MC20는 생산량이 적지만 높은 마진으로 수익을 냈고, 그레칼레는 브랜드 문턱을 낮췄다. 즉 장기적으로는 그레칼레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1)마세라티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2)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리고 3)숨어있는 여성 소비자까지 확보해야 한다. 원래 기블리의 임무였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예전만큼의 경쟁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① 익스테리어



작지만 당돌한 눈매와 낮게 내린 콧날. MC20의 등장 이후, 마세라티 신차들은 V6 수퍼카를 닮은 새 패밀리룩을 입고 있다. 첫 번째 타자가 그레칼레였다. 브랜드에 다시 한번 활기를 불어넣을 핵심 차종과 딱 어울렸다. 덕분에 젊고 신선하다. 중후한 르반떼와 달리 당돌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에서 거대한 라디에이터 그릴과 삼지창 엠블럼이 정체성을 지킨다.


다소 껑충한 얼굴과 다르게, 옆과 뒷모습은 상당히 차분하다. 포르쉐 마칸 S보다 44㎜ 높지만(1665㎜) 길이(4,850㎜)와 휠베이스(2,901)㎜가 각각 124, 94㎜씩 길어 비례가 낮고 늘씬하다. 부드럽게 흐르는 캐릭터라인과 완만하게 떨어지는 루프, 팽팽하게 부푼 리어 펜더로 마세라티만의 우아함을 뽐낸다. 더욱 매끄러운 표면을 위해 매립식 도어 핸들도 달았다.


뒷모습은 상위 트림인 트로페오 못지않게 과격하다. 리어램프를 날렵한 부메랑 형태로 그려내고, 촘촘한 선을 새겨 디테일을 살렸다. 2.0L 엔진을 품었지만 범퍼 양쪽에 멋스러운 듀얼 트윈 머플러를 달았다. 여기서 시선을 조금 더 내리면 너비 295㎜에 달하는 광폭 타이어를 확인할 수 있다. 앞뒤 모두 폭 235㎜ 타이어를 쓰는 GT 트림보다 본격적이다. 휠 크기는 20인치.
② 인테리어








마세라티의 실내 디자인이 이 정도였던가? 문을 열자마자 감탄했다. 아날로그 계기판과 저렴한 플라스틱 버튼 등 기존 인테리어에서 아쉬웠던 점이 몽땅 사라졌다. 이제 12.3인치 디지털 계기판이 들어가며, 중앙 디스플레이 패널은 12.3인치 및 8.8인치 모니터를 위아래로 쌓아 만들었다. 두 화면 사이엔 변속 버튼을 가로로 배치했다. 센터콘솔에서 기어 레버를 빼면서 수납공간을 더 크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려하다. 강렬한 로쏘(Rosso) 레드 컬러 가죽에 곡선 스티칭을 더해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대시보드를 완성했다. 모니터 좌우 단추 장식과 바람 방향 조절 레버에 새긴 정교한 패턴, 금속 질감이 잘 드러나는 소너스 파베르(Sonus Faber) 스피커 커버도 인상적이다. 대시보드 위에는 디지털 시계를 얹어 과거와 미래의 만남을 표현했다. 포르쉐가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운전에 전념하도록 만든다면, 마세라티는 럭셔리한 구성으로 탑승객의 감성을 건드린다.



스티어링 휠에는 다양한 버튼들이 모였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시동 스위치. 원래 마세라티는 포르쉐처럼 시동 버튼을 운전대 왼쪽 대시보드에 달았다. 드라이버가 차로 뛰어들어 출발했던 과거 르망 내구레이스 규정의 영향 때문이다. 키 박스를 왼쪽에 두면 왼손으로 시동을 걸면서 오른손으로 1단 기어를 넣어 비교적 빠르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이제는 운전대 위로 자리를 옮겨 ‘왼쪽’이라는 전통에 레이스카 분위기까지 더했다.






두 모니터의 역할은 명확하다. 상단 모니터는 ‘마세라티 인텔리전트 어시스턴트(MIA)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품어 내비게이션과 차의 정보 등을 띄운다. 무선 애플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를 지원하며, 주행 중 동력 전달 및 배분 과정과 터보·오일 압력, 순간 토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운영체제는 안드로이드 오토모티브. 1,500만 화소의 뛰어난 해상도도 장점이다.
아래는 공조장치 전용 화면이다. 온도와 바람 세기, 시트 열선 및 통풍 기능까지 전부 넣었다. 그 양쪽에 헤드램프와 대시보드 시계 화면 전환, 앰비언트 라이트, 에어 서스펜션 높이 조절 기능을 덧붙였다. 아이콘이 빽빽하게 들어섰지만 배치가 간단해 적응하기 쉽다. 단점 하나만 언급하자면, 비상등 버튼마저 터치 방식이라 운전 도중에 누르기가 어렵다.


2열 공간은 차급 대비 넉넉하다. 평균 키의 성인 남성이 앉아도 앞 시트와 무릎 사이에 주먹이 2개 이상 들어간다. 헤드룸도 충분하긴 마찬가지. 단 등받이가 약간 서있고, 각도 조절이 불가능하다. 차체 바닥으로 구동축이 지나가는 탓에 센터 터널도 솟았다. 중앙 콘솔에는 2열 전용 송풍구와 온도 조절 디스플레이, USB-A 및 C 타입 단자를 하나씩 마련했다.


트렁크 용량은 535L. 마칸(488L)보다 47L 더 넓은 적재공간을 지녔다. 뒷좌석 시트는 4:2:4로 나눠 활용성을 높였다. 시트를 접을 땐 트렁크 양쪽 벽에 위치한 레버를 당기거나, 뒷문을 열고 시트 쿠션 아래 레버를 이용하면 된다. 덩치에 걸맞게 2열과 트렁크 모두 여유로워 실용성이 좋다.
③ 파워트레인 및 섀시


그레칼레는 두 가지 엔진을 쓴다. 고성능 버전 트로페오는 530마력 V6 3.0L 가솔린 트윈터보 네튜노(Nettuno) 엔진을 쓴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 가속을 3.8초 만에 해치울 만큼 강력하다. 시승차인 모데나에는 직렬 4기통 2.0L 가솔린 터보 엔진을 얹었다. 기본형인 GT 트림과 공유하는데, 최고출력을 30마력 더 높은 330마력으로 조율했다. 최대토크는 45.9㎏·m.
여기에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엮었다. 벨트 스타터 제너레이터(BSG)와 48V 배터리, e-부스터, DC/DC 컨버터를 통해 엔진 효율과 성능을 올렸다. 앞서 기블리 및 르반떼 하이브리드에 들어갔던 파워트레인이다. 그 결과 0→시속 100㎞ 가속을 5.3초에 마치면서 9.8㎞/L의 복합연비를 달성했다. 최고속도는 시속 240㎞. 엔진 힘은 ZF 8단 자동변속기를 거쳐 네 바퀴로 향한다.
④ 주행성능


인테리어 디자인을 통해 시각적 감성을 채웠다면. 시동을 건 뒤부터는 청각적 만족감을 더한다. 시동을 걸자 꽤 날카로운 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4기통이라고 무시하지는 마’라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차 중이나 느긋하게 가속할 땐 은근한 울림을 전한다. 그러나 고성능 버전이 아닌 탓인지, 스포츠 모드와 GT·컴포트 모드의 엔진음 차이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대신 배기 머플러가 개성 있는 소리를 낸다.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아 속도를 올리면 변속과 함께 ‘파라락’하며 귀를 자극한다. 4기통 엔진으로 최상의 사운드를 끌어내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파워트레인 외의 소리도 흥미롭다. 각종 경고음은 악기로 연주한 듯 생동감 넘치고, 방향지시등 작동음마저 입체적이다. 평소 신경 쓰지 않는 소소한 부분에도 특별함을 더했다.



시승 당일에 비가 많이 내렸지만, 안전한 범위 내에서 최대 가속 성능도 확인해 봤다. 이때 중앙 모니터로 그래픽을 보는 맛이 쏠쏠하다. 엔진 동력과 배터리 전력 흐름, 각 바퀴에 걸리는 힘의 비중을 실시간으로 나타낸다. 정지 상태에서 ‘Drag Race’ 메뉴를 누르면 시속 100㎞까지의 가속 시간도 측정할 수 있다. 모든 항목에 ‘Ready’ 표시가 떴을 때 출발하면 된다.
젖은 노면에서 기록한 가속 시간은 6.4초. 차체를 밀어내기 위해 동력은 뒷바퀴에 더 많이 보낸다. 그런데 평범한 가속 상황에서도 앞뒤 구동 비율이 비슷했다. 기본적으로 뒤 차축에 힘을 집중하는 AWD 시스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짜릿한 핸들링을 자랑하는 후륜구동과 안정적인 사륜구동의 이점을 섞어낸 셈. 뒷바퀴에 유독 폭이 넓은 타이어를 끼운 이유가 있었다.


그레칼레의 진짜 재미는 굽잇길에서 발견했다. 조향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민첩한 덕분이다. 운전대 조작 → 앞바퀴 회전 → 방향 전환까지의 과정이 아주 빠르다. 동시에 에어 서스펜션이 급격한 기울임을 막아 운전 몰입도를 키웠다. 급격한 스티어링 휠 조작으로 균형을 깨지 않는 이상 롤을 일관적으로 억제한다. 몸은 높게 떠 있으나, 손맛은 영락없는 스포츠카다.
운전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 변속기 D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지금부터 수동 모드다. 스티어링 칼럼에 달린 큼직한 시프트 패들로 8단 기어를 마음껏 다뤘다. 다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변속 타이밍을 놓쳐도 절대 다음 기어를 물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운전자에게 엔진과 변속기의 모든 권한을 넘겨 ‘기계 다루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한다.


촬영을 마치고 쭉 뻗은 국도에 올랐다. 이번엔 승차감이 돋보인다. 운동성능을 강조한 모델답게 서스펜션 감쇠력은 탄탄하다. 고르지 못한 노면 정보는 곧장 엉덩이로 올라온다. 장점은 고속 안정성. 잔진동을 양껏 흡수해 매끈한 주행 질감을 구현했다. 스포츠 모드로 달려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주행 모드에 따른 댐퍼 감쇠력 차이가 적고, 차체 높이를 15㎜ 내려 무게중심도 낮추기 때문이다. 장거리를 함께할 그랜드 투어러로도 합격점이다.
연비도 생각보다 훌륭하다. 강원도 춘천에서 서울 은평구까지 약 81㎞를 달린 결과, 트립컴퓨터는 1L당 12.7㎞의 연비를 기록했다. 도심 속 8㎞ 구간만 빼면 전부 시속 70~100㎞ 사이로 달렸을 만큼 교통 흐름은 원활했다. 최대한 높은 기어를 연결하는 변속기와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함께 달성한 기록이다.
⑤ 총평

이 글을 읽고 난 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뉠 듯하다. 여전히 마칸을 선호하거나, 그레칼레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거나. 마칸은 절대 후회 없는 선택지다. 전 세계 수많은 리뷰와 누적 판매량이 마칸을 고를 이유를 설명한다. 아마 그레칼레의 등장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갈 테다. 다양한 면에서 칭찬했지만, 사실 경쟁상대를 압도할 결정적인 ‘한 방’까진 찾지 못했다.

대신 빈틈을 분명하게 파고들었다. 독일산 D 세그먼트 SUV들은 대체로 이성적이고 익숙하다. ‘운전’ 외적인 부분에선 신선함을 느끼기 어렵다. 반면 그레칼레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도로 위를 달릴 때도 기분이 새롭다. 특히 정성스럽게 빚은 인테리어는 동급 라이벌들보다 한층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낸다. 달리기 실력과 아름다운 디자인을 모두 손에 넣고 싶다면, 그레칼레를 꼭 만나보길 권한다.
장점
1) 동급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2) 날렵한 핸들링과 듬직한 하체
3) 대폭 개선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단점
1) 저속에서의 브레이크 소음
2) 작동감이 더 명확할 필요가 있는 기어 버튼
3) 낮은 rpm을 유지할 때 생기는 진동
<제원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