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잠가버렸다”…최민정 1000m 예선 1위, 이건 ‘우승 신호’였다

사람들이 쇼트트랙을 “변수의 스포츠”라고 부르는 건, 실력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장면이 늘 나오기 때문이다. 넘어짐 하나, 접촉 하나, 레인 한 번만 잘못 잡아도 메달이 바뀐다. 그래서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예선 1위’는 종종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최민정의 예선 1위는 느낌이 다르다. 빠른 기록보다 더 무서운 건, 레이스가 너무 ‘정리’돼 있었다는 점이다.

출발부터 최민정은 앞에서 뻗지 않았다. 세 번째 자리에서 레이스를 보며 숨을 고르는 척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숨 고르기가 아니라 “언제 문을 열지” 계산하는 시간이었다. 7바퀴를 남긴 순간,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는 찰나에 안쪽 빈 공간이 생기자마자 몸이 먼저 들어갔다. 5바퀴 남기고는 더 깊은 인코스로 다시 한 번 칼처럼 파고들었다. 그러고 나서 보여준 건 속도가 아니라 ‘차단’이었다.

뒤에서 따라붙던 킴 부탱(캐나다)이 틈을 보자마자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최민정은 공간을 아예 주지 않았다. 단순히 빠르게 달린 게 아니다. 상대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미리 지워버리는 주행이었다. 쇼트트랙에서 이게 가능한 선수는 흔치 않다. 무리하게 막으면 페널티가 날 수 있고, 너무 안전하게 타면 추월이 막힌다. 최민정은 그 얇은 줄 위를 너무 자연스럽게 걸었다.

기록은 1분 26초 925. 32명 중 전체 1위. 숫자만 놓고 보면 “역시 에이스”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핵심은 ‘레이스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올림픽 예선은 자잘한 충돌이 많고, 초반에 꼬이면 괜히 힘만 빼기 쉽다. 그런데 최민정은 힘을 쓰는 타이밍도, 추월하는 각도도, 막는 위치도 너무 단정했다. 쉽게 말해, 상대가 뭘 해도 “그림이 안 나온다”는 느낌을 줬다.

더 흥미로운 건, 이 예선 1위가 여자 대표팀 전체 흐름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 여자 쇼트트랙은 기분 좋은 장면과 씁쓸한 장면을 같이 겪고 있다. 500m에서 전원 결선 실패라는 충격이 있었고, 그 아쉬움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계주 3000m에서는 최민정이 역전을 두 번이나 만들어내며 결승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어진 1000m 예선에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를 다시 보여줬다.

이런 선수가 팀에 있다는 건, 단순히 메달 기대치가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다. ‘팀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쇼트트랙은 특히 그렇다. 한 명이 크게 흔들리면 옆에 있는 선수도 심리적으로 따라 흔들린다. 반대로 한 명이 중심을 잡으면, 나머지 선수들은 자기 레이스에만 집중할 여유가 생긴다. 이번 예선에서 김길리와 노도희가 보여준 안정감도 그런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김길리는 “올림픽이 처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침착했다. 선두를 무작정 따라붙지 않고, 딱 붙었다가 ‘열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레이스 운영이 더 인상적이었다. 뒤에서 안쪽, 바깥쪽으로 들어오려는 선수들을 막아내는데, 괜히 몸으로 부딪히지 않고 라인으로 해결했다. 흔히 말하는 ‘철벽’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빠르기만 한 선수와, 레이스를 통제하는 선수의 차이가 이런 데서 나온다.

노도희도 좋았다. 3위에서 2위로 올라설 때 타이밍이 정확했다. 곡선으로 접어드는 순간, 다른 선수들이 바깥에서 밀고 들어오는 틈을 보고 즉시 움직였다. 쇼트트랙에서 1~2초 늦으면 그 문은 바로 닫힌다. 노도희는 그 문이 닫히기 전에 발을 먼저 넣었다. 그리고 막판 스퍼트로 ‘무난히’ 통과했는데, 사실 그 무난함이 가장 어렵다. 올림픽에서는 무난함을 지키는 게 제일 힘들다.

이제 관심은 16일, 여자 1000m 준준결승 조 편성으로 이동한다. 최민정이 아리안나 폰타나(이탈리아)와 같은 조라는 소식은 그 자체로 빅매치다. 폰타나는 2006년부터 올림픽을 뛰어온 베테랑이고, 메달이 13개나 되는 선수다. 홈 관중의 함성까지 등에 업는다. 이런 상대와 한 조에서 붙는 건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선 ‘기회’이기도 하다. 강자와 같이 달리면 경기 속도가 올라가고, 레이스가 빨리 정리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폰타나 같은 선수는 ‘정면 승부’만 하는 타입이 아니다. 몸싸움과 자리 싸움이 강하고, 홈에서 심판 시선까지 계산할 줄 아는 선수다. 최민정이 예선처럼 깔끔하게 길을 잠그려 해도, 준준결승부터는 상대가 훨씬 더 거칠게 달라붙을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두 가지다. 첫째, 무리하지 않고도 선두권 자리를 ‘초반에’ 확보할 수 있느냐. 둘째, 마지막 두 바퀴에서 흔히 나오는 접촉 변수를 얼마나 피할 수 있느냐.

그리고 이 대회 여자 1000m의 더 큰 그림은 ‘멀티 경쟁’이다. 캐나다의 사라 울트, 벨기에, 네덜란드 같은 강자들이 줄줄이 있다. 특히 1000m는 체력과 스피드가 동시에 필요한 거리라, 스타트만 좋다고 끝까지 버티지 못한다. 반대로 후반만 강하다고 해도 초반에 갇히면 추월 기회가 없다. 최민정이 예선에서 보여준 “두 번의 인코스, 그리고 완벽한 차단”은 1000m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을 한 번에 보여준 셈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꾸 잊는 게 있다. 최민정은 그냥 ‘잘 타는 선수’가 아니다. 큰 대회에서 큰 장면을 여러 번 만든 선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흔들릴 만한 상황에서도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표정은 상대에게는 압박이고, 팀에게는 안정이다. 이번 예선 1위가 단순한 통과가 아니라 “컨디션이 제대로 올라왔다”는 신호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칼럼이라면, 기대만 키우는 말로 끝낼 수는 없다. 한국 쇼트트랙은 늘 ‘잘하는데도’ 변수를 맞아왔다. 판정, 접촉, 넘어짐, 레인 싸움. 특히 홈 관중이 있는 나라 선수와 붙을 때, 분위기가 경기장을 휘감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필요한 건 “나는 빠르다”가 아니라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다. 오늘 최민정의 예선은 그 메시지에 더 가깝다. 틈을 안 준 게 아니라, 아예 문을 잠갔다.

그리고 이건 김길리와 노도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준준결승부터는 상대가 더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고, 작은 실수 하나가 탈락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 보여준 운영이라면, 적어도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은 크게 줄었다. 결국 메달은 마지막 한 바퀴에서 결정되겠지만, 그 마지막 한 바퀴에 서기 위해서는 오늘 같은 “정리된 레이스”가 먼저 필요하다.

내일 저녁, 여자 1000m는 진짜로 시작된다. 더 빠른 선수와 부딪히고, 더 큰 이름과 한 조에서 숨을 나누게 된다. 최민정-폰타나의 맞대결은 팬들에게는 설레는 선물이고, 선수에게는 가장 위험한 시험대다. 하지만 오늘처럼만 문을 잠근다면, 이번 대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최민정 자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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