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가 고 이순재를 추모하며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을 특별 편성했다. 25일 91세로 별세한 이순재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유작을 다시 꺼내 시청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한 셈이다.
이날 오후 10시 45분부터는 이순재의 유작 시트콤 ‘개소리’ 1~4회가 연속 방영된다. 이순재는 이 작품으로 지난 2024년 생애 첫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상을 받은 작품이자, 배우 인생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았다. 당시 시상식 무대에서 그는 “이 나이에 이런 상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며 감회를 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다. 지난해 9월 방송된 ‘개소리’는 이순재, 김용건, 임채무, 예수정, 송옥숙 등 연기 경력만 270년이 넘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노년의 일상을 밝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시니어 중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기존 드라마들과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졌고, 그래서 더욱 주목받았다.
배우 이순재의 마지막 드라마

드라마는 이미지 타격으로 연예계를 떠난 배우 이순재가 휴식을 위해 거제로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만난 퇴역 경찰견 소피와의 특별한 교감이 전환점이 된다. 소피의 말을 알아듣게 된 주인공이 동료들과 함께 엉뚱하고 따뜻한 사건들을 겪어가는 이야기는 장르물 일색인 콘텐츠 사이에서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줬다.
시트콤 ‘논스톱 5’를 집필했던 변숙경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변 작가는 노년을 단순히 저무는 시기로 그리지 않았다.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저물어가는 노년이 아니라 피어나고 있는 노년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보다는 실종된 아들, 동료의 죽음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웃음과 따뜻함으로 풀어냈다. 작가의 말처럼 ‘개소리’는 무거운 현실도 가볍게 받아들이는 방식의 힘을 보여줬다.
극 중 장면 하나하나가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 무인 햄버거 가게에 들어간 노인들이 키오스크를 몰라 당황하다가 도망 나온 아이에게 도움을 받는 장면, 백내장 수술 전엔 미남이라 착각했던 남성을 수술 후 정색하며 바라보는 에피소드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들은 변 작가가 부모님에게 들은 실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작가는 “부모님이 햄버거 가게에서 헤매다 그냥 나오신 일, 아버지 백내장 수술 후 주름이 너무 잘 보여 한숨을 쉬셨다는 어머니의 말에서 에피소드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웃음과 공감을 동시에 안긴 ‘시니어벤져스’

드라마 속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대사처럼, ‘개소리’ 속 ‘시니어벤져스’는 나이 들어서도 계속 배우고 성장해간다. 순재가 소피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속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후배 현타와의 오해도 풀어낸다. 시니어들이 세대 간 오해를 스스로 해소해나가는 과정은 웃음을 주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남겼다.
‘개소리’는 단순한 웃음만 주는 작품이 아니다. 원로배우들이 ‘민폐’나 ‘꼰대’로 그려지는 대신, 귀엽고 따뜻한 존재로 다가서도록 연출된 점도 주목받았다. 작가는 “원로배우들이 귀엽다는 반응이 제일 기뻤다”고 말했다.

26일 밤에는 또 다른 특별 방송이 이어진다. 오후 11시 10분에는 2006년 방송된 단막극 ‘드라마시티 – 십분간, 당신의 사소한’이 재편성됐다. 이순재는 단막극에서도 몰입도 높은 연기를 보여주며 짧은 분량 안에 강한 여운을 남겼다.
한편, 이순재는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1960년 KBS 1기 공채 탤런트가 되며 방송 연기를 시작한 그는 ‘허준’, ‘상도’, ‘이산’, ‘공주의 남자’, ‘사랑이 뭐길래’, ‘엄마가 뿔났다’ 등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했다.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와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는 유쾌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새로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연극 무대에도 애정이 깊었다. ‘세일즈맨의 죽음’, ‘돈키호테’, ‘리어왕’, ‘앙리 할아버지와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 꾸준히 작품을 올리며 무대 위 존재감을 이어왔다. 2023년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로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건강 악화로 재활 치료를 받던 중 별세했다.

정치권에 몸담은 시기도 있다. 1992년 총선에서 서울 중랑갑에 당선되며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배우로서, 공인의 위치에서도 그는 언제나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이다. 장지는 경기도 이천 에덴낙원이다. 고인은 유작 ‘개소리’를 끝으로 대중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Copyright © 드라마피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