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세계와 닮은 변호사 시장 [세상에 이런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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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말하려 하니 조금 수줍다.
개업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무협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법률위원회에 같이 참여한 인연으로 같은 법인에 있게 된 변호사들은 냉혹한 송무 시장에서 사건을 먼저 제안해주고 살아남는 법을 전수해주는, 사형·사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잠 못 드는 밤 새벽까지 법서를 읽던 여러 날, 위로가 된 무협 웹툰의 한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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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말하려 하니 조금 수줍다. 시간이 나면 무협 웹툰을 읽는다. 많이 읽다 보니 이제는 텍스트를 넘나들며 반복되는 무협 장르의 장치들을 알게 되었다. 무협지 기본 스토리는 이렇다. 기구한 체질 또는 운명을 지닌 주인공이 회귀 또는 환생하여 기억과 경험을 무기로 이번 생을 다시 살게 되는데, 노력과 기연(奇緣)을 통해 엄청난 고수가 되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
개업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무협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하필이면 왜 그때였을지 생각해본다. 아마도 무협의 세계가 변호사의 송무 세계와 닮았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재미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림은 예측 불가한 세계다. 무협물의 인물은 냉혹한 강호의 세계에 뛰어들어 온갖 임무를 수행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이류, 일류를 넘어 절정, 초절정, 화경의 고수로 성장하게 된다. 단,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전 기 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들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송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별개의 사실관계를 가지고 다른 판사와 변호사가 개입하여 탄생, 소멸하는 각 사건의 결말을 100%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무기를 들고 예측불허의 냉혹한 송무 시장에 뛰어들어 사건을 맡아 진행하면서 의뢰인의 피해와 억울함을 회복시킨다. 사건이 끝날 때마다 깨달음을 얻어 법률가로서 한층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단, 변호사로서 돈과 권력이라는 주화입마에 빠져, 들어서면 안 되는 길을 가는 법률가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강호에서 뜻이 맞는 무림인을 만나 우정을 나누는 것도 무협물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혈혈단신으로 복수 내지 성공을 위해 무림을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에게도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동료들이 생기고 위기의 순간에서 서로를 구한다.
송무 과정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다른 변호사들을 만나 같이 사건을 수행하기도 하고 위로와 격려, 지지를 보낸다. ‘대입 상대평가는 학생들의 건강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취지로 제기한 ‘대입 상대평가 헌법소원 청구 사건’의 공동 대리인인 변호사들과는 지속적으로 만나 각자 다루고 있는 사건에 대한 고민과 전략을 나눈다. 서로의 수고를 토닥이는 좋은 동료이다. 특히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법률위원회에 같이 참여한 인연으로 같은 법인에 있게 된 변호사들은 냉혹한 송무 시장에서 사건을 먼저 제안해주고 살아남는 법을 전수해주는, 사형·사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개업 직후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렸다. 100m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이 전력을 다해 뛰고 있는데 뒤돌아보니 제자리뛰기를 하는 것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언제쯤 기연과 같은 사건을 만나 늦깎이 개업 변호사인 내가 동기들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을지 발을 동동거렸다.
무학의 기본처럼 견고한 탑 쌓아가려면
잠 못 드는 밤 새벽까지 법서를 읽던 여러 날, 위로가 된 무협 웹툰의 한 장면이 있다. 진정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화려한 기술을 수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매일의 성실함이라고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큰 바위를 어깨에 메고 산을 오르내려 체력을 단련하고 무술의 기초 자세를 수백, 수천 번 수련하는 등 기본이 되는 훈련을 매일 켜켜이 쌓아가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누구나 아는 매일의 성실함이라는 원칙. 그렇지만 이를 실행하여 고수가 되는 이는 드물다. 송무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 또한 무학의 기본처럼 견고한 탑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무협지를 통해 깨닫는다. 단단한 기단을 만들다 보면 언젠가는 어디에서나 비치는 화산의 매화처럼 아픈 사람들을 법으로 치유하는 변호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변호사로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쓰는 ‘화경의 고수’가 될 날을 그리며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는다.
홍민정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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