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은 0인데 시가총액은 8650조…역대급 사기로 ‘살인마’라 불렸던 남자의 수법은 [히코노미]
[히코노미-5] 도박과 여자. 그의 인생에 유이(有二)한 낙이었습니다. 매일 밤 그가 향한 곳은 일확천금의 꿈으로 가득한 도박장. 한탕 크게 당겨서 큰 부자로 살아보겠다는 사내들의 어리석은 꿈으로 가득한 곳. 20살이 갓 넘은 청년은 이곳에서 자산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푼돈이라도 손에 쥔 날이면 여자에게 달려가곤 했습니다.
닳고 닳은 그에게 일말의 순애보가 남아있었는지. 그가 미치도록 갖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모든 귀족이 탐낼 정도로 미인이었던 탓에 라이벌도 많았지요. 꿈에 그리던 그 여인이 다른 남자의 추파를 받는 것을 보았을 때, 혈기를 끝내 참지 못하고 그 사내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살인자’ 존 로의 영광은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프랑스로 도주한 그가 재정 총감으로서 경제의 혁신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했을 때 엔비디아와 애플을 합한 회사도 만들어 냈습니다(물론 거품이었지만). 오늘날 화폐 금융 시스템을 처음 상상한 것이 존 로였습니다. 한 살인자가 불러온 혁신을 사색하는 시간입니다.
날 때부터 난봉꾼은 아니었습니다. 존 로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번듯한 은행 가문 자제로 1671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로는 금세공사이자 은행가. 돈에 눈이 밝았던 덕분에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부를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존 로가 자신처럼 훌륭한 은행가가 되기를 바랐지요. 수학과 회계학을 꾸준히 공부시킨 배경이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를 바로잡는 마지막 울타리였습니다. 에딘버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은행업을 배우면서 가업을 이어갑니다. 사내로서 이제 제 몫을 다할 무렵 아버지 윌리엄 로가 눈을 감았습니다. 존 로의 나이 고작 18살이었습니다.
가업을 물려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사업을 통해 들어오는 큰돈을 존 로는 운용할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제어되던 방탕한 품성에 고삐가 풀린 것이었습니다. 술을 먹고, 도박하고, 여자를 만나는 삶에 빠져든 것이었지요.
그의 성(Law)과 다르게 Unlaw(불법)에 가까운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왕의 정부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에게 반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스코틀랜드의 번듯한 귀족 도련님에서 살인마로 추락하게 된 셈입니다.
‘은행가’로서의 기질은 이때부터 꽃 피우기 시작합니다. 물산과 돈이 활기차게 도는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업에 대한 피가 다시 끓기 시작합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은행의 역할을 보면서였습니다. 시 정부가 설립한 암스테르담 은행은 경제 순환의 마중물 역할을 자임합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건 네덜란드 상인들이 활용하는 ‘환어음’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상인들이 무겁고 보관이 어려운 금화나 은화로 거래를 하는 반면,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환어음’ 종이를 들고 간편하게 물건을 교환합니다. 경제적으로 튼실하고 안정적인 은행이 지급을 보증하는 시스템이었지요.
네덜란드의 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고, 국부는 늘어납니다. 조그만 크기의 네덜란드를 강국 프랑스마저 무시할 수 없게 된 배경입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기어이 승리를 쟁취하는 네덜란드를 보며 존 로는 깨닫습니다. “금융은 한 나라를 강국으로 만든다.”
이 역시 신뢰있는 은행들이 중간에 지급을 보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존 로는 이제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무역에서 사용되는 신용기반 지폐를 전 국가 차원에서 사용한다면, 그 국가의 부는 크게 늘어날 거야.” 유럽 화폐혁신의 불꽃이 존 로의 마음속에 촛불처럼 옮겨 붙습니다.
경제 이론으로 무장한 존 로는 야심이 넘쳤습니다. 시칠리아 왕국과 사보이 공작에게 찾아가 자신의 말대로 경제를 이끌어 볼 것을 권했습니다. 당연히 돌아온 대답은 거절. 평판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귀족 자제의 말을 믿을 리 없었지요.
존 로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 탑니다. 어렵사리 루이 15세와 어린 왕을 보필하는 섭정 필립 오를레앙을 만납니다. 존 로를 면박할 것이란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매년 원금이 늘어나는 절체절명의 순간. 프랑스는 ’파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 “모든 빚을 갚을 수 있다”며 홀연히 나타난 운명적 사나이. 난봉꾼, 살인마로 불렸던 남자. 존 로였습니다.
존 로는 프랑스 경제 개혁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의 빚 청산이었습니다. 존 로의 ’첫 번째 화살‘은 은행이었습니다. 은행이 종이 지폐 발행을 늘려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복안. 그동안 프랑스 경제는 금화·은화와 같은 무거운 화폐에 의존해 유동성 부족으로 경제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았다고 존 로는 분석합니다.
사용이 용이한 종이돈을 사용하면 그만큼 많은 경제 활동이 일어나고, 이는 세입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구상이었지요. 지폐를 은행에 제출하면 언제든 은화로 교환되었기에 상인들은 안심하고 지폐를 활용한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보던 모델을 국가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었지요. 프랑스의 첫 은행 ‘방크 제네랄’의 출범이었습니다.
방크 제네랄의 효과를 톡톡히 본 왕실은 은행을 인수하며 직접 운영에 나섭니다. ‘방크 로얄’로의 승격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은행권 지폐를 사용하라고 독려합니다. 존 로의 구상대로 프랑스는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720년 프랑스의 새로운 재무총감이 임명됩니다. 존 로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나라 살림을 도맡은 기획재정부 장관. 방탕한 살인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경제의 신’ 존 로만이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화살’도 곧바로 발표됩니다. 국부를 실질적으로 늘리기 위한 사업 구상안입니다. 미국의 미시시피강 인근 루이지애나 무역을 독점하는 국유회사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미시시피 회사’였습니다.
존 로는 여기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정부 채권으로만 살 수 있게 하는 방안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의 ‘빚’을 유망한 회사 주식으로 탈바꿈 시키는 전략입니다. 미시시피 회사의 장밋빛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던 채권자들은 주식을 사는 데 선뜻 동의합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원했습니다. 더 많은 미시시피 주식을, 더 많은 프랑스의 지폐를. 귀족과 시민. 계급을 가리지 않고 이들은 모두 앞다퉈 미시시피 회사의 주주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곧 미시시피 회사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파리 시내는 흥분과 아드레날린으로 가득합니다. 미시시피 주식회사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모든 주주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제 자신들은 부자가 됐다고, 프랑스는 영원한 부국이 될 것이라고.
프랑스 왕실이 발행한 지폐는 엄청난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라는 부작용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물가상승을 뛰어넘는 황금 ‘미시시피 회사 주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국가에 요구합니다. “더 많은 은행 지폐를 발행하라. 우리가 미시시피 주식을 살 수 있게.”
은행에는 지폐를 들고 은화 교환을 요구하는 시민으로 가득했고, 존 로를 잡아 죽이자는 분노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은행권의 남발로 야기된 고물가, 주식 폭락으로 가난에 빠져버린 시민들, 금융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존 로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프랑스를 조용히 탈출해 이탈리아 베니스에 정착합니다. 그가 경제를 배우고, 도박에 빠진 그곳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존 로는 다시 도박에 손을 댑니다. 협잡꾼에서 경제의 신으로, 또다시 협잡꾼으로. 1729년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격변에 빠져듭니다. ‘방크’라는 이름은 금기였습니다. 주식회사 설립은 무려 150년 동안이나 금지됩니다. 금융과 산업을 경시한 프랑스는 무너지고, 유럽의 헤게모니는 영국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루이14세의 말년처럼, 루이15세의 프랑스는 다시 과대 채무국으로 전락합니다. 후임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그의 혁신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신용’에 기반한 화폐 시스템이 경제를 혁신한다는 구상은 오늘날 현대 금융제도의 기반이 됐기 때문입니다. 존 로와 달리 오늘날 중앙은행은 그 어떤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돼 운영됩니다. 그의 실패에서 교정해 더욱 정교한 프로그램을 구현한 것이지요.
민주주의가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듯, 경제는 시민의 욕망과 부를 먹이삼아 성장합니다. 협잡꾼이자, 살인마, 그리고 위대한 경제 실험자였던 존 로가 남긴 교훈입니다.
ㅇ루이14세가 남긴 빚으로 허덕이고 있던 프랑스를 구원해주기 위해 등장한 남자가 스코틀랜드 도박꾼 ’존 로‘였다.
ㅇ국가가 은행을 만들어 지폐 발행을 늘리고, 무역 회사를 독점하면 부를 늘릴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ㅇ이 모든 계획이 ’미시시피 회사‘ 거품 붕괴로 실패하면서 프랑스는 금융을 금기하기 시작했다.
ㅇ그럼에도 신뢰 기반 지폐를 상상한 그의 구상은 오늘날 현대 금융제도에 녹아 있다.
<참고문헌>
ㅇ윤은주, 18세기 초 프랑스의 재정위기와 로 체제, 프랑스사 연구 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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