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흔들던 17세 소녀 [오늘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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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4월1일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다음해인 1920년 4월28일 일본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형이 1년6개월로 줄었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지만 수감자를 설득해 독립을 향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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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28일. 유관순 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일제에 맞서 한반도 전역에 퍼진 3.1운동의 중심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꽃다운 17세 소녀였다.
1902년 12월16일 충남 목천군(현 천안) 한 가정집에서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여아가 태어났다.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유 열사는 1916년 충남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던 유 열사는 시위에 동참했다. 같은해 3월5일 서울 만세 시위에도 참여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폐교하자 고향으로 돌아온 유 열사는 돌아온 뒤에도 항쟁의 뜻을 이어갔다. 지역 내 교회와 청신 학교를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운동 상황을 알렸다. 이러한 노력으로 4월1일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같은해 6월30일 유 열사는 항소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확정지었다. 상고는 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20년 4월28일 일본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형이 1년6개월로 줄었다.
유 열사 시신도 고문으로 인한 훼손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화학당 측이 시신반환을 요구했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선 이를 거부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같은해 10월14일 룰루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은 유 열사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렀다.
유찬우 기자 threeyu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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