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만세"… 태극기 흔들던 17세 소녀 [오늘의역사]

유찬우 기자 2024. 9. 2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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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4월1일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다음해인 1920년 4월28일 일본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형이 1년6개월로 줄었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지만 수감자를 설득해 독립을 향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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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유관순 열사가 1920년 9월28일 17세 나이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사진은 유 열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항거'의 한 장면. /스틸컷=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20년 9월28일. 유관순 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일제에 맞서 한반도 전역에 퍼진 3.1운동의 중심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꽃다운 17세 소녀였다.

1902년 12월16일 충남 목천군(현 천안) 한 가정집에서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여아가 태어났다.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유 열사는 1916년 충남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던 유 열사는 시위에 동참했다. 같은해 3월5일 서울 만세 시위에도 참여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폐교하자 고향으로 돌아온 유 열사는 돌아온 뒤에도 항쟁의 뜻을 이어갔다. 지역 내 교회와 청신 학교를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운동 상황을 알렸다. 이러한 노력으로 4월1일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 선두엔 유 열사가 있었다. 일제 헌병은 맨 앞 무리를 주동자로 간주해 체포했다. 하지만 미성년자임을 감안해 "범행을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할 시 선처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유 열사는 일제 헌병에 체포된 뒤에도 꺾이지 않는 독립 의지를 보였다. 사진은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될 당시의 모습.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19년 5월9일 공주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유 열사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당시 일본인 재판장은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유 열사는 "나는 왜X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X들은 반드시 처벌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며 의자를 집어 던졌다.

같은해 6월30일 유 열사는 항소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확정지었다. 상고는 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20년 4월28일 일본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형이 1년6개월로 줄었다.

유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뒤로도 연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지만 수감자를 설득해 독립을 향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같은해 9월28일 오전 8시20분 유 열사는 방광이 파열해 옥사했다. 출소 이틀 전이었다.
유 열사는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사진은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쓰인 고문 기구들 중 일부. /사진=인스타그램 캡처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벌어진 고문의 참상은 끔찍했다. 여성의 질 안에 미꾸라지를 넣는가 하면 조그마한 상자 안에 가둬놓고 압정을 박기도 했다. 또 각종 전기·물 고문과 더불어 일제가 원하는 자백을 듣기 전까지 치아·손·발톱을 뽑았다.

유 열사 시신도 고문으로 인한 훼손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화학당 측이 시신반환을 요구했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선 이를 거부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같은해 10월14일 룰루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은 유 열사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렀다.

유 열사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일제의 파묘 이후 유실됐다. 훗날 1989년 10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강원 영월군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어 추모했다.
유 열사의 시신은 파묘로 찾아볼 수 없다. 사진은 영화 '항거'에서 유 열사 역을 맡은 배우 고아성의 연기 장면. /사진=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유찬우 기자 threeyu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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